날카로운 억새가 무리 지어 너울너울 춤을 추니
문자는 말은 다 담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담지 못한다. 그러한 까닭에 옛 어른들은 “<주역>을 읽지 않으면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으니 글이 곧 그림이요, 그림이 곧 글이 되어야 한다.
나는 벨라한의 뜻밖의 초대로 장성순 화백의 기획초대전 '작품에 말을 걸다'을 보기 위해 양재천을 걷고 있었다.
냇가에 날카로운 억새가 무리 지어 너울너울 춤을 추니 억새의 칼날 같은 잎새도 연인들에게는 그저 사랑을 도와줄 소품 정도로 여긴듯하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세상만사, 하늘과 땅은 말할것도 없고 이름 없는 잡풀마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느껴질 때, 그때는 진정 사랑하고 있는 계절이다.
1927년,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심한 열병으로 왼쪽 귀를 완전히 상실한다. 선친은 그림을 좋아하여 여러 화가가 집에 드나들었고, 그중 허백련 선생도 2년 동안 머물렀다.
그때 처음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는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답게 붓 가는 데로 이어지는 선의 부드러운 면을 가르켜 주었으나, 화백은 함경도의 바위를 닮아 거칠거칠한 선을 즐겨 그렸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여러 번 고비를 겪으면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 겪은 자발적 선택이라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진한 행복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지만, 타인의 강압으로 이룬 경험은 언제나 끔찍한 것이 된다.
장성순 화백은 역사책에서나 읽을 법한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이다. 그러니 그 세대는 황폐요, 전쟁이요, 반항이라, 직관이 시대 정신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했다.
“나의 작품세계는 다분히 직관과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한 바탕에 인식된 인간의 삶이 빚어낸 환상적 기호가 순수한 조형 요소로 변해 회화하였다.”
나는 보았다.
벨라한갤러리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 듯"하다는 사실을, 회색 톤 밑그림 위에 알 수 없는 도형들이 희미하게 채색되고, 그 위에 진한 사각형 박스 안에 글자가 되다만 도형이 마치 상형문자처럼 비틀려 있는 것을. 용이 지나간 듯 이무기가 지나간 듯 거칠거칠한 질감, 화가는 돌이 좋아 거칠거칠한 질감을 표현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전서체(篆書體)로 보였다.
최보결 교수가 춤사위를 펼친다. 누구나 자신의 언어가 있다.
내가 글이라면, 그분은 몸짓이다. 내가 글로서 응어리진 것을 풀어낸다면, 그분은 몸짓으로 풀어낸다. 내가 글로서 말을 한다면, 그분은 손짓, 발짓으로 말한다. 내가 정교한 개념으로 쓴다면, 그분은 거친 직관으로 쓴다. 내가 이성의 언어라면, 그녀는 감성의 언어다.
지하철 3호선 매봉역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거, 뭔가 있었는데?” 하는 첫 느낌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다. 직관의 거칠거칠한 언어도 정교한 알고리즘 속에서 들어와야 의미로 전환된다.
“변화는 이로움(利)으로 시작되나, 좋음과 흉함으로 변해 정으로 옮겨붙는다. 그런 까닭에 사랑과 미움이 서로 다투어 길과 흉이 되고, 멀고 가까움이 뉘우침과 인색함으로 되고, 진정과 거짓이 다시 이로움과 해로움으로 된다.” (<주역> 계사하전(繫辭下傳-12)
무릇 세상일이란 지나고 보면 애틋함이 가득하여도 가까이 있으면서 만나지 못하면 아낌이 오히려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후회하면서 뉘우침이 되거나 좋음이 미움으로 바뀌어 흉사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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