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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선 윤일원 Jun 16. 2024

돈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지만

낮에는 꾸벅 졸고 밤에는 잠을 자니

   

돈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지만, 돈 없다고 행복한 것은 더구나 아니다. 절대 가난과 갖은 질병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된 지금에도 여전히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설왕설래하는 것을 보면, 이는 인간 본성의 한 형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인류가 문자로 의사 표현을 남긴 이래 수신(修身)의 덕목으로 ‘행복’이 빠진 적도 없지만, 시대에 따라 다소 다른 기준이 적용된 것을 보면 시대를 가르는 가르마는 분명히 존재한다.    

 

‘晝眠夕寐(주면석매), 藍筍象狀(남순상상)’, “낮에는 꾸벅 졸고 밤에는 잠을 자니, 상아 침대 위에 푸른 대나무 돗자리로다.” (<천자문> 제106구)     



동양 고전에 나온 행복론은 삶의 형질을 바꿀 수 없는 숙명에서 오는 강한 자기 긍정의 한 요소인 체념적 행복론이다.     


특히 가난과 질병을 천명으로 받아들였던 삶에 더하여 신분이 핏줄로 결정되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삶 같지만, 인간만의 고유의 정신적 행위로 삶의 내적 동력인 ‘행복’을 추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러한 속성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큰 병을 앓고 난 뒤 느껴지는 삶의 달콤함이나, 오랜 실직 후 찾아오는 안락함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는 자의식의 한 표현이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거의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지만 자기가 할 수 없는 ‘철벽’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이것을 하고픈데, 저것이 안 돼” 하는 욕구 불만형이다.     


여기에 필수재 중 하나가 ‘돈’이라는 자본이다. 돈은 축적된 자본의 한 형태로 즉시 교환할 수 있는 ‘매개체’이지만, 자본은 돈과 달리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샘과 같은 존재다.    


자본주의 국가에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이러한 가치사슬을 깨닫고 미친 듯이 자본 축적에 달라붙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결국 이것은 부자가 되는 꿈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삶이다.     


자본의 절대량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지만, 행복은 그 양에 비례하여 따라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 발생된 욕구 불만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자본을 축적한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가 행복감이 확연히 떨어지는 이유는 축적된 자본의 양은 비슷할지라도 선진국이 수백 년 동안 누려왔던 것을 일시에 하고픈 욕망으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을 축적한 자는 더 많이 누리다 죽으려는 듯 온통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탐하여 여유가 없고, 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자는 늘 내 자본이 없다고 ‘축적’에만 신경을 써 또 여유를 찾을 수 없고, 아파도 병원 가기를 머뭇거려야 할 정도로 진짜로 가난한 사람은 진짜로 '여유'가 없다.     


다시 본질로 돌아와, 인간은 유한함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가 한 가운데가 불룩한 종 모양의 커브를 그릴 것 같지만 사실은 우측으로 급격히 찌그러진 종 모양이 되어 순식간에 삶의 질을 확연히 떨어뜨린다.    


 

“그러므로 성인은 배를 위함이지 눈을 위해서가 아니다(是以聖人 爲腹不爲目)” (<노자> 제12장)  

   

장 자크 루소도 “행복은 은행 계좌요, 맛있는 요리요, 튼튼한 위장이다”라고 했듯이, 인간은 한 끼 먹을 수 있는 양은 일정하지만, 바라보는 눈의 욕망은 무한대이다.      


여기에 어느 정도 행복의 지혜가 있는 듯하다. 자족(自足)의 묘한 도리다. 그나마 다행으로 눈의 욕망도 턱없이 증가하였지만, 과거에 비해 매우 낮은 비용으로 왕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린다는 점이다.    


#행복 #루소 #천자문 #노자 #맹꽁깨노 #맹꽁깨천 #자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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