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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선 윤일원 Jul 23. 2024

나으리 꽃

꽃잎은 뒤로 활짝 젖혀져 살을 먹인 화살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고

   

아무리 이름 없는 잡풀이라도 꽃은 예쁜 법, 그중에 꽃 이름이 ‘나리’인 꽃, 참나리가 있다.      


꽃의 왕은 모란이요, 꽃의 여왕은 장미라, 그 한가운데 어정쩡한 지위가 나리다. 평민도 아니요 천민도 아니며 더구나 귀하디귀한 임금도 아닌 관료라면 당상관 정3품 이상이 되어야 하거늘 그저 당하관으로 고을 원님이 되어 나으리라는 호칭을 얻었으니, 차라리 꽃이 되려면 여왕이 되든지 차라리 이름 없는 잡풀이 더 좋아라.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가 왔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밤마다 비가 온다. 계절의 변동성이 큰 만큼 비의 양도 엄청나 양동이로 쏟아붓듯 온다. 


몽골초원 땅나리



어디 이 장마철에 남아 난 꽃이 있을까? 이름 없는 잡풀마저 문드러져 사그라졌는데, 꽃의 여왕인 장미는 계절이 지나 맥도 못 추고 힘겨워하는 마당에 비마저 쏟아지니 흐트러진 볼품이 꽃송이만큼 처량하다.     


이럴 때, 제철을 만난 꽃이 있다. 7~8월 땡볕을 마다치 않고 이 장마에도 어김없이 제자리를 지키면서 주황색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달면서 까만 주근깨를 여지없이 자랑한다.     


향기는 없다. 향기는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이다. 아무리 시골 깡촌에서 자랐어도 여드름은 나고 성정은 부풀어 센티멘탈이 극에 달할 때 “백합꽃 가득 두고 잠들면 백합 향기에 죽는다.”라는 소설 구절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어 못내 그리워한 적이 있었다.     


백합(Lily)은 야생 꽃이 아니다. 나리를 가져다 원예품종으로 개량하면서 향기를 잔뜩 집어넣고 뽕을 잔뜩 집어넣어 크기를 큼지막하게 만든 꽃이다.    

 

일산호수 공원 참나리



무엇이든 제 것이 천대받을 때가 있다. 문명의 속성이다. 문명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아무리 싸구려라도 강대국 것이면 좋아 보인다. 그럴즈음 하얀 이국 소녀가 “요거, 참 예뿨요” 하면 뒤돌아 보고 그제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여름이 무르익는 7~8월 한낮 뙤약볕에 잡풀마저 열기로 시들어갈 즈음 시골 논두렁 밭두렁 개울가에 어김없이 죽은 깨 가득 주황색 꽃이 늠름하게 무더기로 늘어서면 바로 참나리다.     

 

꽃잎은 뒤로 활짝 젖혀져 살을 먹인 화살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고 수술과 암술은 앞으로 호기롭게 쭉 거침없이 내뿜어져 하늘을 향하고, 검은 수술은 하늘에 매달린 시소 마냥 진한 갈색이 되어 바람에 흔들린다.    

  

호랑이를 닮은 꽃이어서 그럴까 유독 호랑나비가 좋아한다. 아하, 죽은 깨 가득 주황색 꽃잎 무리 위로 팔랑이는 호랑나비, 네가 너를 가졌구나. 네가 오니 잎겨드랑이에 검은 구슬이 깨알처럼 박히고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니 내년에도 너와 꼭 닮은 너를 수없이 볼 수 있겠구나.     


두문동재 하늘 나리


“처음으로 이름 지어 보니 본래 이름 지어져 있도다(始制有名, 名亦旣有).” (<노자> 제32장)  

    

하늘은 녹(祿)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듯, 참나리, 하늘나리, 말나리, 땅나리, 섬말나리, 솔나리 등등 꽁무니에 달라 붙은 나리 이름을 보고 있노라면, 나리가 원래 이름인 고을 원님 ‘나으리’로다.


#참나리 #백합 #노자제32장 #시제유명 #몽골초원 #호랑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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