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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2), 承 가주기

by 삼선 윤일원

지리산 종주(2), 承 가주기


2025.10.21.


지리산 성삼재행 함양 버스가 나를 내려놓고 가버리자, 어둠이 짙게 깔린 문명의 표시는 ‘e-mart’밖에 없다. 벌써 같이 탑승한 여자 산객, 네 분이 조용히 산행 준비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나는 가볍게 몸풀기와 배낭을 정리한 후 예의 ‘준비 완료’의 표시로 랜턴을 장착하고 산행길을 나선다.


새벽 03:20분, 불빛 하나에 의지한 산행, 따각 따각, 스틱이 바닥을 찍는 소리만 고요한 적막을 깨뜨리면서 머리에는 일직선 불빛을 쏟아내고 등에는 커다란 짐 보따리를 둘러멘 인간이 깊은 숲속으로 걸어가니, 뭇짐승들의 눈에는 괴물도 이런 괴물이 없으리라.


첫날은 도상(圖上) 18.8km, 벽소령 대피소까지 가야 한다. 아마도 12시간은 훌쩍 넘게 걸리리라.


새벽 04:10,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한다. 연무가 짙은 안개비로 변한다. 비와 연무는 다르다. 산 아래 사람은 산이 구름 속에 갇혔다고 하는 바로 그 구름이다.


나는 완벽한 운무에 갇혀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코펠과 버너를 꺼내 달달 커피를 끓이면서 서울서 갖고 온 단팥빵을 뜨거운 온기와 함께 홀짝홀짝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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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완벽한 배낭을 꾸려야 한다. 배낭의 무게가 멍에처럼 달라붙어 무게를 느끼지 않을 때, 비로소 종주가 시작된다. 저 멀리 짙은 연무와 어둠 속에서도 하늘과 맞닿은 노고단 고개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제 본령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다시 못 올 대동강이요 돌이킬 수 없는 철령이로다.


유년의 그림자가 어른댄다.


칠흑 같은 담벼락을 돌면 말 방앗간 귀신이 나오고, 정낭(재래식 화장실)에 가면 얼굴 없는 달걀귀신이 우글거리고, 부엌데기에는 배고픈 할미 귀신들이 가마솥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드는 곳, 그곳은 유년의 내 고향이었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라도, 날만 밝으면 밖으로 뛰어나가 놀았으니, 손 등은 새까만 연탄재처럼 변해 붉은 실핏줄이 결 따라 터져도 그저 안티푸라민 하나만 있으면 족했고, 호롱불 등잔 아래 책이라도 읽을라치면 주무시는 할아버지가 이불을 펴는 바람에 그만 꺼져 날마다 숙제는 벼락치기가 전부였던 그 시절, 아무리 악조건이라도 소년이 사내로 변하듯, 얼굴에 여드름투성이 사춘기가 되어 십 리 산길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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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국가도 성장기의 진통을 호되게 겪고 있었다. 가파르게 힘겹게 올라가는 기차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폭력의 시대를 맞이하였지만, 국가의 생산성 향상은 단군 이래 최대치로 치솟고, 그렇게 성장의 진통이 잦아들 무렵 88올림픽이 끝난 그해 겨울 나도 마산·창원 공단을 떠나 지리산 쌍계사 국사암으로 들어와 학습기의 마지막 진통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 08:20, 힘겹게 노루목을 지나고 있다. 그래도 반야봉에 올라 굽이치는 산맥의 장엄함을 보리라는 희망을 안고 한 발 한 발 내 몸무게를 중력에 거스르면서 옮겨놓고 있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안갯속 괴물처럼 삐쭉 나온 고사목이요, 물기 잔뜩 머금은 자줏빛 붉은색 노루오줌이요, 바위틈새 비바람을 온전히 견딘 구절초 한 송이였다.


아침 09:32, 삼도봉에 다다른다. 코펠과 버너를 꺼내 물을 끓이고 컵라면과 햇반으로 아점을 한다. 간간이 세찬 바람이 일어 짙은 운무를 날리자, 노고단, 차일봉, 왕시루봉이 스쳐 지나가듯 보인다.


이제 더 이상 산행 중 식사는 없다. 삼도봉(1499) 아래에는 커다란 V자 협곡이 악마의 아가리처럼 입을 떡 벌리고 우리를 잡아먹을 듯 가파른 계단이 화개재까지 이어지고, 거기서 다시 토끼봉(1534)과 명선봉(1586)으로 치고 올라와야 드디어 연하천 대피소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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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20분, 벽소령 대피소 3.6km 이정표를 앞두고 연하천 대피소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행동식을 꺼내 든다. 간간이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하지만 결단코 거부하면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이 구간, 연하천에서 벽소령을 지나 세석평전으로 이어지는 이 구간이 내게는 마(魔)의 종주 코스다. 다듬지 않은 울퉁불퉁한 바윗길에 응달 수직 비탈길이 수없이 반복되어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형 사고를 유발하기에 여간 조심조심 걷지 않으면 안 된다.


日暮途遠(일모도원)!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물고” 오자서의 말이다. 복수의 시각은 째깍째깍 사라지는데 늙음은 속절없이 다가오니, 내게도 마의 구간은 하염없이 지속되는데 날은 속절없이 저물어간다.


드디어, 기이한 형제바위를 지나 천왕봉이 한눈에 보이는 안부에 이르자, 난데없이 저 멀리 숲속에서 손을 흔드는 사내가 보인다. 하동 경감님이다. 이젠 살았구나!


그렇게 벽소령 야외 테이블에서 목살에, 삼겹살에 돼지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산행의 피로감이 달콤한 추억으로 전환시키고 나니, 오늘의 기록 20.5km, 14시간. 드디어 허리를 방바닥에 눕히고 드르렁드르렁 숨넘어간다.


*내일은 ‘지리산 종주(3), 轉 가주기’ 편으로 벽소령에서 장터목까지입니다. 지리산 종주는 10월 11일 11:00 ~10월 14일 21:00, 성삼재에서 천왕봉, 벽소령까지이며 모두 32시간 43.5킬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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