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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1), 起 학습기

by 삼선 윤일원

지리산 종주(1), 起 학습기


2025.10.20.


여전히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 초, 나는 양재동 더히든바인에서 쨍그랑 와인잔을 우아하게 부딪히면서 인생 개똥철학을 듣고 있었다.

앞으로 인간의 기대수명은 120세가 될 터인데 각주기마다 30년씩 계산하면 지금은 임서기(林棲期)에 해당되어 ‘노올자’을 즐겨한다고 한다고 할 때, 정작 놀란 사람은 말한 그가 아니라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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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드디어 입산할 시기가 되었다.

나도 지인들에게 늘 개똥철학을 읊으면서 “인생은 시공에서 좌표 찍기가 전부”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저 멀리 130억 전 우주의 빅뱅에서 지금의 나 그리고 먼먼 훗날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들 지구, 이제 시공을 좀 좁혀 해방 이후 위대한 대한민국,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릴뿐더러 감히 중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고, 그렇게 깔보던 일본을 넌지시 무시하는 지경에 이른 우리의 삶이 얼마나 기쁜가? 늘 감사하면서 살아온 내가 이제 공직 생활 33년을 마무리하고 +3.5년 차를 맞이한 지금에 드디어 내 좌표를 찾아 떠나야 한다.


어느 인도 힌두교도가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누어 ‘학습기(學習期)-가주기(家住期)-임서기(林棲期)-유랑기(流浪期)’로 정했는데, 정하고 보니 3000년 후 지금이 딱 맞는 구분이 되었다. 그에 따르면 나는 임서기(林棲期)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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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태어나서 첫 30년은 없는 집안에 태어나 죽어라 공부하는 죄밖에 없어 죽을 둥 살 등 모르고 지내면서 남몰래 ‘꿈’을 품었으되,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그만 땅속 깊은 심연에 묻어두었던 시기라면,

두 번째 30년은 취직을 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독립 조건을 갖추었으니 그래도 ‘사나이’라고 가정을 꾸려 가장으로서 온갖 험난한 수모도 마다하지 않고 불길 속으로 땅 밑으로도 무거운 짐을 끌고 가도 군말 없이 뚜벅뚜벅 그 길을 택하는 것은 내가 이룬 가(家)가 있기 때문이라,

이제 세 번째 30년을 맞이하여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가정을 위한 의무와 책임도 마감하고 그들을 곁눈질로 살펴도 족할 만하여, 내 숲에 거주하면서 지난 일을 회상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일은 기억하고, 못나고 서글픈 일을 털어내면서’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 ‘true color’에 귀 기울일 것이로다.


나, 들어가리라. 지리산으로! 아무리 빼고 더해도 배낭 무게가 12.7kg, 거기에다 카메라 1.5kg을 더하니 제법 휘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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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밖으로는 가을 장맛비가 하염없이 쏟아진다. 이런 날은 서글퍼진다. 내가 존경하는 국방부 실장님이 있었다. 그분은 새벽 4시에 조깅을 하는데, 언제나 가장 어려운 구간이 거실에서 문 앞까지 1.5m라고 한다. 그 구간만 건너면 하루 종일 달려도 문제가 없고, 새벽 비에도 끄떡없다고 한다. 나는 배낭을 메고 일어서기만 하면 된다.


동서울 터미널 밤 11:00에 떠나는 지리산 성삼재행 버스, 거기에 몸만 실으면 우야든지 떠나게 되고 입산하게 된다. 내 기록에 따르면 지리산 종주 11년 만에 재입산이다.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여전히 가을비가 폭우가 되어 쏟아진다. 그저 터미널 처마 끝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함양행 버스에 불이 켜지자, 배낭을 짐칸에 쑤셔 넣고 얼른 올라탄다.


*내일은 지리산 종주기 두 번째, 承 ‘가주기’ 편으로 성삼재에서 벽소령 대피소까지입니다. 지리산 종주는 10월 11일 11:00 ~10월 14일 21:00, 성삼재에서 천왕봉, 벽소령까지이며 모두 32시간 43.5킬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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