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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두막 Aug 05. 2022

자청 작가님과 숭산 스님의 대화

숭산 스님 '선의 나침반' 초록

 숭산 스님은 달라이 라마, 틱낫한, 마하 거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았던 인물입니다. 스님의 가르침에서 자청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 제목을 이렇게 지어봤습니다. 역행자 7단계 이론 중 첫 번째인 '자의식 해체'에 관해 아는 분이라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책을 대화처럼 읽는다면 이해의 깊이가 더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 역행자를 읽지 않으신 분은 제가 초록한 글을 읽으시면 조금 도움이 되실 겁니다.



 숭산 스님과 자청 작가님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만 쓰는 단어가 다릅니다. 그래서 조금 혼동이 올 수 있는데요.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움직이는 마음', '생각' 등은 자청 작가님의 '자의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본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두 분은 180도 다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자청 작가님의 본성은 '자의식'을 말합니다. 반면 숭산 스님의 본성은 '자의식이 해체된 역행자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 그럼 이걸 염두에 두고 초록한 글을 읽어보시죠.



불보에서 얘기하는 아름다움이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생각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바깥의 모양이나 형태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스크리트로 그것은 ‘사마디’, 즉 ‘삼매’라고 부른다. 우리의 본성 혹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뜻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면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나 풍경이 나타난다 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삼매의 본래 의미이다. 앉아 있든, 서 있든, 누워 있든, 운전을 하든, 누군가와 얘기를 하든 단지 ‘그것을 할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다.



불교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참 자아’를 믿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본성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부처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믿을 수 있으며, 나무, 하늘, 부처, 신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다. 지혜를 갖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생각이 일어나기 전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름도, 모양도 없는 지점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지점을 마음, 본질, 물질, 하나님, 하느님, 자기 자신, 부처, 영혼, 의식 등등으로 부른다.



선은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이처럼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아주 명확하다. 우리는 이 길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본성이 무엇이냐?”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무엇이 열반이냐?”하고 묻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그것을 깨닫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너무 황홀한 꿈을 꾸어 입조차 열 수 없는 벙어리처럼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아주 깊고 명확한 것을 이해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 이전이기 때문에 입을 열 수 없는 것이다. 말과 언어 이상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다. 깨닫고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가르치는 일이 필요하다. “탕” 이것은 깨달음과는 또 다른 범주이기 때문이다. “탕”



“나는 누구인가?”

선 수행으로 가는 문으로 들어가려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생각에도 집착하지 말아라.



이 세계와 우리 자신의 관계는 생각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어떤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선불교의 문을 통과하고 싶으면 먼저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오직 모를 뿐’이라고 부를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부처님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경전 밖에 있는 특별한 전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전은 단지 설명하기만 한다. 본성을 설명하는 말만 하더라도 1백 개를 써도 모자란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모두 안다 하더라도 우리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본성은 말이나 단어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자기의 본성을 찾는 사람에게 경전이나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배고픈 사람에게 단지 비빔밥이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아무리 봐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참선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  “여기 비빔밥이 있다. 한 입 떠서 먹어라.” 아무리 불경 전문가가 된다 해도 ‘자기 자신’을 모르면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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