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인이 되려는 두려움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개인이 구조를 바꿀 수 있음을 분명하게 가려쳐야 한다. 역사는 결국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것임을 분명히 깨우쳐주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믿는 사람은 소수의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의무교육이 제공하는 학교 수업으로부터 세뇌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늘 예외적인 존재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그런 예외적인 ‘미친 사람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그런 미친 사람들이 항상 세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런 미친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의 결과물이다. 변화를 원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사회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꿈꾼다면 인간을 독립변인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한 인간이 정치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이 속한 정치적 사회적 조건에 어떻게 언제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한 인간에게 사회구조를 바꾸겠다는 ‘변화의 의지’가 어떻게 발현되며, 그러한 의지를 관철하는 힘은 무엇인지도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 그런 것을 연구하는 학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개인이 전체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겠는지를 설명하는 이론도 들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개인이 어떻게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구조를 스스로 바꿀 수 있는지는 가르칠 수조차 없다.


인간이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려 할 때 꼭 필요한 것이 강력한 마음근력이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자기조절력, 타인과의 협력과 설득을 이뤄내는 대인관계력,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끊임없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자기동기력 없이는 어떠한 일도 성취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근력이 약한 사람은 결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꿔나갈 수 없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해야 변화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마음근력이 강한 사람, 즉 자기가치감과 자기존중감을 바탕으로 강력한 자기조절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만이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책임감,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발휘할 수 있다. 비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 타인에 대해 유형 무형의 비인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마음근력이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게 자기파괴적이다.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전에 항상 주변의 사람들을 먼저 파괴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폭력이다. 폭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가 그 사회의 민주주의의 척도다. 공정과 정의도 폭력을 기반으로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정치 과정에서 모든 폭력을 몰아내는 것이 민주주의다. 인간의 폭력은 두려움과 분노 등 부정적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 마음근력이 약한 사람은 두려움과 분노를 기반으로 폭력을 행사하게 마련이다.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나가려면 감정조절력과 건강한 마음근력을 지닌 구성원들이 필요하다. 마음근력을 키우자는 것은 따라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을 만들어가자는 제언이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근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따라서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고도 공동체적인 제안인 셈이다.


ㅡ내면소통 :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근력 훈련. 김주환. 20쪽.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절망 또는 자신이 자기라는 것을, 영원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의 무지>


이 상태가 절망이고, 또 절망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의 진리의 독선’이라고 불리어도 좋은 하나의 사례에 대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진리는 그 자신과 허위를 구별짓는 지표다. 그러나 진리의 독선은 물론 사람들에게 그다지 주의를 끌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실한 것과의 관계, 즉 자기가 진실한 것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 오류 속에 있다는 것을 소크라테스처럼 최대의 불행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대개의 경우, 감정적인 것이 지성적인 경우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빛에 비추어 본다면, 사실은 불행한 것일 텐데도 잘못 생각하여 행복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이런 오류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러한 사람은 화를 내며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가장 원망스러운 적으로 생각하고, 그런 행위를 불의의 습격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사람의 행복을 말살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일종의 살인에 가까운 것이라고 간주한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감정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이 그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가 유쾌함이나 불쾌함이라고 하는 감성적인 것의 범주에 살고 있으면서 정신이나 진리라고 하는 것에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감성적인 것을 가지고서 구태여 정신이고자 하든지, 정신인 것에 견디어 낼만한 용기를 가지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다. 아무리 허영심과 자기만족에 강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은 자기가 자신에 대해서 아주 적은 관념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정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허영심과 자기만족이 강하다. 서로 사이좋게 말이다.


예를 들어 지하실과 1층 및 2층으로 된 집이 한 채 있는데, 그것이 각 계층 사람들 사이의 신분의 차이에 맞게 살도록 설비되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인간을 그런 집에 비교해 보자. 그러면 대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집이면서도 일, 이층이 아니라 지하실에 즐겨 살고 싶어 한다는, 참으로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정신일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만들어진 심신의 종합이며, 이것이 인간이라는 집의 구조이다. 그런데 인간은 지하실에 사사는 것, 즉 감성의 규정 속에 사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 그것도 단순히 좋아해서 지하실에 살고 싶어 하는 것만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를 향해 2층이 비어 있어 자유롭게 쓰실 수 있으니 2층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어디 살든 당신의 집인걸요, 하고 권유라도 하면 화를 낼 정도로 인간은 지하실에 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오류 속에 있다는 것은 정말 비 소크라테스적(철학적 반어적)인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놀라울 정도로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경탄할 만한 실례가 있다. 어떤 사상가가 거대한 전당, 체계, 모든 세상과 세계 역사 등 기타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체계를 쌓아 올렸는데 반해, 그 사상가의 개인적인 생활을 보면, 놀랍게도 그는 거대한 높은 천장이 붙은 전당에 살지 않고 그 옆의 헛간이라든지 개집 또는 기껏해야 문지기 방에 살고 있다고 하는, 참으로 놀랍고도 우스꽝스러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단 한 마디라도 이런 모순에 신경을 쓰라고 말한다면, 그는 감정을 상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체계만 완전히 갖추어 진다면(그것은 오류 속에 있는 덕분에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오류 속에 있다는 것쯤은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ㅡ죽음에 이르는 병. 동서문화사. 키에르케고르. 219쪽.




시인 이시하라 요시로의 ‘망향과 바다’는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군으로 복무했다는 이유로 전쟁 범죄자롸 낙인찍혀 8년동안 시베리아 수용소에 억류되었던 저자 자신의 험난한 체험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는 그가 만났던 가노 부이치라는 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베리아 곳곳의 수용소를 전전하는 일본군 포로들의 생활은 너무도 비참했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와 중노동에 시달리며 기아와 갈증, 피로와 공포로 인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채 하루하루 짐승처럼 연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마다 벌목장으로 가서 나무를 베는 노동을 해야 했는데, 작업 현장까지 오가는 길에 항상 다섯 줄로 대열을 맞추어 걸었다. 이때 자동소총을 둘러멘 경비병들이 전후좌우를 에워싸고 함께 걸으며, 포로들이한 발짝이라도 대열에서 이탈하면 도망자로 간주하고 사살했다.


문제는 단단하게 얼어붙은 길을 지친 몸으로 행진하자니 자칫 다리가 휘청거리거나 미끄러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개라도 쏴 죽이듯이 충동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희생자는 대부분 행렬의 오른쪽이나 왼쪽 끝에서 나왔다. 무리의 가장자리에 있으면 사살될 위험이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포로들은 대열을 이룰 때 앞 다퉈 약한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서로 중간에 서려고 했다.


그런데 가노라는 인물은 달랐다. 그는 항상 솔선해서 바깥쪽 대열에 섰고, 가장 혹독한 노동에 제일 먼저 뛰어들었다. 급기야 수용소 측은 가노의 이런 행동을 무언의 반항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노는 모진 고문을 온몸으로 감내할 뿐 일절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취조관이 말했다.


“이봐, 우리 인간적으로 이야기하자.”


이 경우에 ‘인간적’이라는 말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 대신에 협조를 약속하라’는 메시지다. 그들이 요구하는 협조는 가장 빠딱한 포로 몇 명을 지적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정기적으로 포로들을 하나씩 총살시키고 있었다. 이에 가노가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인간이라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내가 인간이라면, 당신은 인간이 아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노가 스스로의 고독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서 진정으로 인간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가노를 ‘단독자’라 불렀다. 자기 삶에 홀로 당당히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ㅡ곁에 두고 읽는 니체. 사이토 다카시.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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