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함과 행복이 우리 자신의 본질이라면, 왜 우리는 항상 평온함과 행복을 경험하지는 않는 걸까요? 당연히 떠오르게 마련인 의문입니다. 왜 다른 일반적인 경험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가끔씩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요? 행복과 불행 모두 알아차림 안에서 번갈아 생겨나는 대상적 경험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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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행복은 불행과 더불어 번갈아 일어나는 일시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파란 하늘과 구름이 서로 반대가 아니듯이 행복과 불행이 서로 반대는 아닙니다. 구름이 파란 하늘을 잠시 가리고 있듯이 불행은 행복을 잠시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우리의 본성이며,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마음의 원천에, 우리 자신의 핵심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드러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대상적 경험의 일종으로 행복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본래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행복 그 자체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불행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불행은 우리가 대상적 경험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ㅡ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루퍼트 스파이라 지음. 김주환 옮김. 32쪽.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 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감사하게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 그의 환자는 빅토리아풍으로 호화롭게 디자인된 침상에 누워 있었지, 아우슈비츠의 오물더미 위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 수용소에서 ‘개인의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이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그런 것을 경험하고 우리는 더 이상 성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됐다. 나는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를 생각한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결국 석탄산 주사를 맞고 살해됐다. 그리고 1983년에 성자로 추대됐다.
ㅡ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259쪽.
우리는 옳고 그른 것과 좋고 나쁜 것을 찾는 대신 삶의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 또는 내가 좋고 너는 나쁘다는 식으로 매사를 바라보는 대신 눈앞에 놓인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많은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진리라고 믿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그럴듯해도 대부분 진리가 아닙니다.
진정한 진리는 주관적이지 않습니다. 특정인에게만 참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을 보편적 진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어디에서 왔든, 배경이 어떻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ㅡ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 말라. 조세프 응우옌. 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