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개성과 진정한 힘

<개성이 없는 것이 가장 개성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가 등의 창작은 개성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20세기에 이르러 이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앞서 언급한 토마스 엘리엇이다.


엘리엇은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시인은 항상 자신을 더 가치 있는 것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의 발달은 부단한 자기희생이며, 부단한 개성의 소멸이다. 예술이란 탈개성화 과정일 뿐이다. 그런 말을 하고 나서 엘리엇은 유명한 비유를 꺼냈다.


“시를 창조할 때 일어나는 일은 산소와 이산화황이 있는 곳에 백금 필라멘트를 넣었을 때 일어나는 화학 반응과 비슷하다.”


훗날 이 화학적 지식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중요한 것이 바로 ‘촉매 반응’이다. 여기서 어떤 비유가 성립하는 것일까?


엘리엇은 촉매제인 백금이 화합 전후로 증감,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이 ‘시인의 개성이 발휘하는 역할’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시로 표현해야 한다.’ ‘개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상식에 맞서서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되고, 개성을 탈피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개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촉매라는 개념을 등장시켰다.


산소와 이산화황을 함께 넣는 것만으로는 화학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에 백금을 넣어야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데, 그 결과로 나온 화합물 안에는 백금이 들어 있지 않다. 백금은 완전히 중립적으로 화합에 참가해 화학 반응을 일으켰을 뿐이다.


시인의 개성도 백금과 같아야지, 그 자체를 표현해서는 안 된다. 개성이 첨가되지 않으면 결코 화합하지 않았을 것을 화합시킨다는 점에서 ‘개성적’일 수 있다. 이것은 그전까지의 예술적 창조 개념에 일침을 날리게 되면서 엘리엇의 ‘개인적 이론(몰개성설)’으로 일컬어지며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무심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한 수학자가 오랫동안 하나의 문제에 몰두해 있었는데, 그 문제를 도저히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떠보니 갑자기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한다. 의지력이 약해졌을 때 비로소 그때까지 분리되어 있던 생각들이 결합된 것이다.


생각할 때 너무 긴장해서는 안 된다. 초조해하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 오히려 느긋하게 마음먹고 자유롭게 나눠야 재미있는 생각이 쉽게 떠오른다. 앞서 말한 몰개성적인 게 좋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재워두고 잊어버리는 시간을 만드는 것도 주관이나 개성을 억누르고 머릿속에서 자유로운 화합이 일어나는 상태를 준비하는 것이다. 생각할 때 가장 좋은 건 무심한 경계다. 하룻밤 자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시간을 끄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ㅡ생각의 도약 : 평범함을 뛰어넘는 초요율 사고법. 도야마 시게히코. 61쪽.




“별로 현대적인 작가는 아니네요.”


“그러니까 읽는 거지. 남들과 똑같은 것을 읽으면 남들과 같은 생각밖에 할 수 없잖아. 그딴 건 촌놈이나 속물의 세계야.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그런 부끄러운 짓은 안 해. 와타나베 알겠어? 이 기숙사에서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인간은 나하고 너뿐이라고.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나 같다고 보면 돼.”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 물어보았다.


“난 알아. 마빡에 간판을 단 것처럼 난 알아. 보기만 해도. 게다가 우리 둘은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고.”

그러나 다들 잘 모르는 게 있었는데, 나가사와가 나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나가사와가 나를 놓아한 것은 내가 그에 대해 조금도 감탄하거나 감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아주 기묘한 인간성의 한 부분. 어딘지 모르게 비뚤어진 부분에 대해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공부를 잘한다든지 아우라를 뿜어낸다든지 남자답다든지 하는데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나의 그런 태도가 몹시 신기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ㅡ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68쪽.




미국 빈자계급을 위한 인문고전 독서과정인 클레멘트 코스의 창립자 얼 쇼리스는 ‘희망의 인문학’에서 미국의 엘리트주의자들의 숨은 의도를 고발하며 그것을 분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문고전을 읽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엘리트주의자들의 충고 때문에 빈민들은 인문학을 공부할 기회를 차단당했고 그 결과 정치적 삶에 이를 수 있는 하나의 효과적인 길을 봉쇄당한 것이다.


… 인문학 학습이 빈민들에게 정치적 삶을 가르치며, 진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공적 세계로 그들을 확실하게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 대다수의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빈민들에게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 그 자체가 부를 재분배하는 의미가 있다.”



‘유색인종 발전을 위한 국가협회’를 세운 흑인 지식인 듀보이스는 미국 인종주의 교육학자들의 교육이론에 반대해서 외롭게 투쟁했다. 황용길 교수가 정리한 듀보이스의 지식교육론 중 일부를 옮겨보겠다.


“어느 인종을 막론하고 미래의 지도자는 지식 중심으로 교육되고 배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교육을 버리라니, 이는 우리의 운명을 백인들에게 맡기고 그들의 사슬에 묶여 마냥 끌려만 다니는 자살 행위와 다름없다.”


ㅡ리딩으로 리드하라. 이지성.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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