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했다.

“제한된 의식이 만들어내는 문제를 억지로 수정하려고 하는 행위는 그게 어떠한 것이든 오히려 그 문제를 고착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문제가 형성되는 수준에서 그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그 문제의 복잡성을 증가시킨다.”


같은 씨앗을 심으면서 다른 열매가 열리기를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의 세계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소마지성을 깨워라’라는 책에서 리사 카파로는 마음의 문제를 같은 수준의 마음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얘기한다.


이론적인 관념의 영역은 현상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의 영역에 ‘관한’ 것으로서 부차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통제력이나 영향력은 더 강하다. 이렇게 본다면 시선의 높이가 만지고 볼 수 있는 세계에 있는 것보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세계에 있는 것이 통제력이라는 의미에서는 더 유리하다.”


변화경영연구소의 구본형 소장은 ‘밥벌이에 지지 말라’고 외쳤다. 밥벌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시선의 높이를 단지 밥에 얹어 두지 말라는 뜻이다. 최진석 교수도 시선의 높이가 높을수록 자신에 대한 통제력과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더 강해진다고 주장한다. 이제 마음의 문제와 삶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았다.


시선의 높이를 ‘생존’에서 ‘자유’로 높이자. 삶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는 생각이다. 그렇게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내 목표와 목적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작동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를 위해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나에게 적지 않은 혼란과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초점을 생각이 아니라 시선의 높이로 이동하자. 생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의 높이에 매달려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무의식적으로 보내는 신호가 생각이다. 자꾸만 원치 않는 생각이 든다면 내 시선의 높이를 점검해야 한다. 자기의 시선이 ‘생존’에 맞춰져 있다면 모든 생각은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이 있다. 우리의 마음이 ‘생존’을 위해 작동하는 생각의 수준이 현시점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적합했을지 모를 생존을 위한 사고방식이 지금도 그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선의 높이를 더 이상 ‘생존’이 아닌 ‘자유’로 이동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 사회적으로 나타난 것이 ‘인문학 열풍’이다. 지금 시대는 밥을 굶어서 죽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의 굶주림으로 낮은 수준의 삶을 살거나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몸을 보호하는 생존이 아니라, 정신을 지키는 자유다.


“저는 사색할 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 알며,

단식할 줄 압니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시선의 높이가 자유를 향한 사람에 관해 그리고 있다. 시선의 높이가 생존에 걸려있는 사람의 마음이 탐진치다. 싯다르타는 눈을 들어 높은 곳을 바라보기에, 먹고 싶은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만지고 싶은 마음을 넘어선 곳을 안다고 한다.


정신을 지키려는 사람은 몸을 지키려는 사람보다 우위에 선다. 생각이 어디에서 나오게 하고 싶은가? 생각은 그저 우리를 위해 작동하는 기계일 뿐이다. 생각에게 새로운 시선을 심어주자.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변화되었음을 확실히 알려 주자. 생각이 생존이 아닌 자유의 염원에서 나오는 사람,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