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삶이 내게 물었다. "어디 가니?"

삶의 성장과정이 궁금한 사람에게

"글쓰기의 심장에 있는 본질적인 행위는 준다는 것이다."


피터 엘보의 힘 있는 글쓰기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처음 이 말을 읽고는 한 동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너무나 중요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너무 필요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를 온전히 내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글쓰기는 상대가 받아들여주지 않을 위험을 감수하고 내어주는 행위다. 다음의 글도 마찬가지다. 주관적이고 추상적이고, 심지어 답답할 수 있는 글이다. 하지만 아래 글을 소화하고 나서부터 내 삶이 업그레이드됐기 때문에 공유하고자 한다. 삶을 크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내 삶의 모습을 탑다운 방식으로 그려보자. 최종적으로 내가 의도하는 것은 공동체 공헌이다. 내 삶이 단지 나를 위한 것이라면 많이 슬플 것 같다. 내 삶을 통해 이 세상이 조금 더 평화롭고 발전하기를 바란다. 공동체 공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자비심이다. 세상에 관심을 갖고 마음과 몸으로 보탬이 될 부분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과 같은 맥락이다. 먼저 마음을 먹어야 행동할 수 있다


자비심을 현실적으로 펴기 위해서는 공의 깨달음, 다른 말로 관계론을 깨달아야 한다. 이 세상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상호의존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서로 이어지고 연결해서 이렇게 저렇게 나타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따라서 한 가지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집착하는 순간 세상의 실상을 놓치게 된다. 어리석고 경솔해진다.


관계론을 깨닫기 위해서는 알아차림 또는 자각이 필요하다. 즉 깨어있다는 뜻이다. 멍한 상태로는 세상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 멍하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 안에 갇혀있다는 뜻이다. 자기 생각에 빠지지 않고 매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 알아차림 상태다.


알아차림과 자각을 위해서는 모른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가 알기로 모른다는 마음을 강조한 사람이 둘 있다. 소크라테스와 숭산선사다. 숭산선사는 외국에 한국불교를 널리 알린 분으로, 오직 모를 뿐이라는 가르침을 주로 사용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을 주로 폈다. 어느 날 당신은 당신이 누군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른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이 두 분의 모른다는 마음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라. 책은 자기가 책이라고, 의자는 자기가 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푸른색은 자기가 푸르다고 말하지 않고, 고양이는 자기가 고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고요하고 자연스럽다. 내 생각이 끼어들기 전의 상태, 이것이 모른다는 마음이다. 모른다는 마음은 알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라, 안다 모른다의 생각이 껴들기 전의 맑은 마음이다.


모른다는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다는 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교만해지고 딱딱해지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의식적으로 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은 이미 들어와 있는 정보에 갇혀있다. 우리가 상식, 사회규칙, 고정관념, 선입견 등으로 부르는 고정된 마음이 안다는 마음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 안에서 환상을 지어내도록 만든다. 성찰을 통해 자기 마음에 갇히지 않는 것이 모른다는 마음이다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보다 구체적인 것을 훈련해야 한다. 바로 독서와 글쓰기다. 이성을 훈련하지 않고는 영성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교육을 받았고, 부처님은 다섯 명의 선생에게 6년 동안 교육을 받았다. 모른다는 마음, 즉 공을 다루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을 다루는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이것이 순서다. 지식을 다루는 기술이 무르익어 갈수록 마음을 닦기가 수월해진다. 가끔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는 분들이 독서를 쓸데없는 것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에 속으면 안 된다. 언어의 한계 안에서 그들의 말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그저 지식의 수준에 갇혀 있는 일반인들에게 경종을 울린 것뿐이다. 지식을 뛰어넘어 마음의 세계로 들어오라고 말이다. 현대의 뛰어난 영적 인물들을 살펴보면 그들 또한 마음을 닦기 전에 이성을 고도로 단련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성과 영성을 그저 상호 보완하면서 나아가는 순서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다. 영성이 없으면 삶이 메마르고, 지식이 없으면 현실을 살아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독서와 글쓰기로 이성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깨어나고자 하는 의도, 세상의 진실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단순히 도구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해서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삶의 모순에 대한 자각,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알게 모르게 자신을 키워준 사회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 이런 본질적인 관점으로 독서와 글쓰기를 대할 필요가 있다. 관점이 바뀌면 에너지가 바뀐다. 에너지가 바뀌면 수행의 질이 바뀐다. 결국 더 큰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