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변화가 시작된 날

2022.02.23.

다음의 글은 내가 변화된 그날에 써 놓은 글과 그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 어제저녁에 소맥을 먹었다. 인위적으로 마음을 좀 비워보려는 몸부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에 불안함을 안고 깨어났다. 몸이 떨고 있었다. 마음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려워했다.

그러다 ‘신'이 떠올랐다. 신을 사용하는 데는 아무래도 기독교가 좋다. 불교는 마음이 신으로 잘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 우선 말해둘 것이 있다. 앞으로의 글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느낌이나 어휘를 사용할 수는 있다. 맥락적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종교적으로 보면 나는 상당히 동양적이다. 불교와 인도의 성자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채사장은 독서법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책을 읽으라고 조언했다. 나는 변화의 시점에서 불편한 책에 마음이 열렸다. 그간 기독교에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는데 더 이상 마음이 닫히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불교나 기독교 등은 그들의 조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담겨있는 진리에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는 불교의 가르침대로 나 자신을 밝히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고통의 구렁에서 건져지는 걸 느꼈다. 그러니 이 날 신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생각을 하려면 우선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여기가 신의 힘이 필요한 지점이다. 신으로 끝나면 안 되지만 신이 없으면 생각도 없다. 여기에 종교의 이유와 동시에 한계가 있다.

-> 여기서 말하는 '상태와 생각'은 일상용어가 아니다. 앞으로 글을 읽어가면서 이해가 깊어질수록 도움이 될 것이다. 상태는 몰입감 비슷한 것으로 일단 이해하자. 그리고 생각은 그 상태 안에서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이다.

신이라는 자기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상정하고 생각하는 것은 '상태'를 경험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신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고효율의 장치다.

'상태'는 느낄 수 있지만 느낌이 없어도 상관없다. 단지 '상태'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핵심은 '상태'를 기억하고 혼란한 마음을 '상태' 안으로 옮기는 거다. 이걸 어떻게 하나 궁금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 의식은 마음을 쓰는 법을 자연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부르면 저절로 의식이 그리로 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혼란한 마음을 '상태'에 맡기고자 마음을 먹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차차 글을 읽으며 더 깊이 이해해보자.

* 내가 말하는 신은 ‘상태'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상태는 다름 아닌 몰입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몰입감의 부족으로 생기고 몰입감의 회복으로 해결될 수 있다.

성공과 의식 수준의 높이는 몰입의 정도에 비례한다. 깨달음은 지속적인 몰입이 일상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갈증은 몰입감의 부족을 반영한다. 몰입이 모든 것을 대변하진 못한다. 하지만 몰입이 없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몰입이 바로 자기가 자기인 상태다. 인생의 의미를 느끼고 타인의 행복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한 마디로 몰입이 없으면 인생은 껍데기다. 사람들이 열망하는 근본은 몰입감이다. 이 몰입을 위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장치가 ‘신'이다.


* 자기가 기도 타입인지 명상 타입인지 파악해야 한다. 기도나 명상이나 둘 다 부작용이 있다. 따라서 둘 다 알아보고 장점만 취하는 게 좋다. 맹신하면 부작용에 빠지기 쉽다.

기도는 맹신에 빠져서 자기를 잃을 수 있고 명상은 자기 속에 갇혀 자의식 과잉이 되기 쉽다.

-> 나는 25년 정도 명상을 한 거 같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고해성사에 가깝다. 그 명상을 통해 자의식 과잉으로 인한 부작용을 제대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명상서적에 나오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아주 크고 명상을 너무 신화적으로 그려놓았다. 그것이 저자의 의도는 아니지만 읽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그게 항상 불만이었고 이제 내 이론에서 해결되었다. 이 이론이 초심자나 부작용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원한다.

변화의 시점부터 나는 기도의 힘을 알게 됐다. 기도를 하면 '상태'를 기억하기에 도움이 되고 그러면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이 되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명상과 기도를 합쳐서 수행이라고 부른다면 내 수행은 끊임없이 마음을 '상태'에 맡기는 것이다.


* 생각은 문명의 차원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시선을 문명에만 두면 내가 메마르는 기분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문명에 대한 생각 이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몰입감을 얻는 것이다.

몰입은 존재고 생각은 기능이다. 존재가 바탕이고 기능은 그 바탕에서의 그림이다. 몰입은 식사와 같다. 밥을 먹지 않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 '상태와 생각'이 균형을 이루어야 함께 깊어지고 삶도 변화한다. 나는 그동안 너무 '상태'에 집착하는 삶을 살았다. 다행히 최진석 교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문명적인 생각에 대해 깨우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둘이 균형을 잡게 되었고 내 삶에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 어떤 수행이 내게 통하는지 보는 기준은 내가 ‘상태'로 들어가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