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책

더 아름다워지고 싶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예전에 써놓은 '상상'을 발견했다.


* 아내서(我內書) '내 안의 책' 인식전환연구소를 상상하자. 우선 내 안의 책을 읽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 원하는 이들과 함께 자기 안의 책을 읽어 가자. 하루하루가 충만하고 기쁜 삶이다. 참 감사하다.

-> 인식전환연구소라는 이름을 떠올린 건 벌써 10년쯤 된 일이다. 영어를 가르치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영어는 말단일 뿐이었다. 영어 이전에 공부가 있고 공부 이전에 독서가 있고 독서 이전에 '인식'이 있었다. 그렇다. 어떤 인식을 가지고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영어를 접하느냐가 핵심이었다. 내가 연구해야 하는 것은 영어가 아니라 인식이라는 '인식'을 얻고는 영어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근래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고 예전의 열정이 슬며시 찾아왔나 보다. 인식전환연구소는 이름이 너무 딱딱한 거 같아 고민하다가 '안에서 in ~'가 떠올랐다. 이것이 아.내.서. '내 안의 책'으로 태어났다. 이는 채근담의 한 구절과도 연결된다.

"사람 마음에 한 편의 참다운 문장이 있으나 온전치 못한 서적들에 가리어 볼 수 없게 되었고, 한 곡의 진실한 음악이 있으나 요염한 가무에 파묻혀 들을 수 없게 되었구나.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외물의 유혹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곧장 자신의 본성을 찾아야 비로소 학문의 진정한 가치를 누리게 될 것이다."


원하는 미래를 어떻게 계획하고 목적할 수 있을까?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보통은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강조한다. 나는 여기에 의문이 든다. 왠지 '미래'의 본질과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란 무엇인가? 아직 오지 않아서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시간이다. 이것이 미래일진대 여기에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청사진을 입힐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미래'일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구체적이고 직선적이고 감각적인 목적이라면 그것은 미래와 상존할 수 없다."

꿈은 현재의 눈으로 볼 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을 때 비로소 미래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이게 붕 뜬 몽상 같지만 '미래의 본질'과 부합하는 게 아닐까? 내가 지금까지 원하는 걸 생각하고 상상하고 이루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번번이 굴러 떨어진 이유가 미래의 본질에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미래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내 입맛에 맞게 움직이는 게 과연 말이나 되는 걸까? 내가 기대하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만이 유일하게 객관적이고 실재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또는 그 아름다움을 발현하고자 하는 공동체를 꿈꾼다. 예전에는 공동체를 위하는 프로젝트를 생각했었다. 글을 한 자 쓰더라도 남을 의식했다. 그런데 한 가지 빠뜨린 걸 발견했다. 공동체를 생각하느라 나 자신을 잊으면 그 공동체는 '나만큼' 불완전해지고 허약해진다. 결국 내 안으로 들어가 공동체로 넓어지는 수밖에 없단 걸 깨달았다.

'내 안의 책'이란 말이 누군가에게는, 마치 성철스님에게서처럼,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힘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안의 책에서 참다운 문장과 진실한 음악을 발견하고 삶이 춤추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까?


고맙습니다. 두 손 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