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전날 아침, 복도엔 테이프 뜯기는 소리와 종이박스 문지르는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교무실엔 평소보다 한 박자 빠른 공기가
흘렀다.
출근 카드 찍고 들어온 나는 먼저 비품실로 향했다. 준비물 리스트를 다시 펼쳐 들었다.
이름표 120세트, 무대용 현수막, 배너 거치대 2개, 마이크 3개, 여분 건전지, 연장선, 테이프 6 롤, 케이블 타이 한 봉지, 진행표 인쇄본, 참가자 명단, 자리배치도…
옆에서 동민샘이 박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미주쌤, 테이프는 이것만 가져가면 돼요?”
“두 롤 더. 그리고 가위는 최소 세 개요. 늘 가위가 사라지니까.”
“맞다, 가위는 늘 증발하죠.” 둘이 피식
웃었다.
행사 담당자인 경선샘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 가보니 텀블러만 덩그러니,
화면엔 ‘자리 비움’ 표시.
누군가가 ‘오늘 경선샘은 오전 출장’이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출장은 이 학교에서 거의 만능열쇠처럼 쓰이는 단어다.
트럭에 짐을 싣는 건 생각보다 일이 많다.
상자에 붙어 있던 메모가 땀에 젖어 까끌까끌해졌다.
부장님 한 분이 지나가며, “고생 많네~” 하고 웃었다.
그 ‘고생’이라는 말이 칭찬이라기보다 ‘나는 못 돕는다’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들릴 때가 있다.
“의자 100인분이면 100개인가요, 120개 깔까요?”
마주 오던 영미샘이 물었다.
“예비 좌석까지 110개요. 통로 확보하려면 저 뒤에 한 줄 비우고.”
“오케이, 오늘 미주샘은 완전 행사 전문 업자 같네요.”
영미샘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행사장은 체육관을 개조한 공간이라, 바닥의 낡은 라인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먼지를 한 번 쓸고 닦고, 의자를 펴고 놓고 다시 맞추고, 의자 다리는 늘 삐뚤빼뚤한 성격을 가졌다.
한 줄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데까지 세 번은 밀고 당겼다.
“이쪽 줄, 두 번째 의자가 높이가 달라요.”
“그거 발에 고무캡이 없네요. 창고에 여분 있어요.”
“없으면 포스트잇 접어서 받치면 돼요. 내장비법.”
우리는 합을 맞춰가며 작은 문제들을 바로바로 봉합했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며, 내 폰에 뜬 메시지를 무심코 펼쳐 보았다.
“미주쌤~ 저 오늘 교육청 들렀다가 시청도 잠깐 가봐야 해서요. 상황만 체크하고 내일 이른 아침에 합류할게요! 진행서는 제가 ‘정리만’해서 올릴게요!”
‘정리만’이라는 말이 눈에 걸렸다.
정리는 늘 마지막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의 것, 대부분의 무게는 이미 누군가가 들어 올린 뒤다.
마이크 테스트를 하며 나는 메모에 별표를 쳤다.
-2번 마이크 잡음 심함(예비와 교체)
-슬라이드 리모컨, 수신기 반응 지연(건전지 교체)
-무대 오른쪽 조명 한 칸 깜빡임(스위치 고정 테이핑)
영미샘이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
“땀 좀 닦아요. 오늘 우리, 행사 두 번 치른 기분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잘 되면 본행사는 늘 매끈하게 흘러간다.
그런데 준비가 잘 된 날, 누가 ‘잘 됐다’는 말을 듣는지는 늘 불분명하다.
오후 세 시가 넘어가자, 학생 자원봉사 몇 명이 합류했다.
자리 배치표를 들고 스티커를 붙이고, 무대 대기선을 표시했다.
“여기 테이프 간격 90cm요. 내일 동선 겹치면 사고 나요.”
“네! 선생님.”
아이들의 대답은 늘 힘이 있다.
그게 내가 이 일을 쉽게 놓지 못하는 이유다.
해가 기울어 체육관 한쪽으로 노을이 밀려 들어왔다.
현수막 글자가 노을빛에 빨갛게 물드는 걸 보며, 나는 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다.
‘내일 이 순간은, 아마 누군가의 자랑이 되겠지.’
그 누군가가 나일 확률은 늘 희박했지만.
마지막으로 체크리스트에 동그라미를 하나씩 채워 넣을 때, 탁— 하고 스위치를 내리며 체육관 전체 불이 꺼졌다.
정적과 함께 뜨거운 공기만 남았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수고하셨습니다.”
그 말을 정말 수고한 사람들에게 조용히 건넸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길, 손목엔 의자 손잡이가 남긴 자국이 붉었다.
트럭에서 내릴 때 팔을 살짝 긁혔는지, 얇은 선 하나가 피부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이런 상처는 금방 아물고, 금방 잊힌다.
마치 오늘의 이 준비처럼.
교무실 문을 열자, 따뜻한 커피 향이 먼저 맞았다.
그리고 그 커피 옆에서, 교감과 경선샘이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휴~ 오늘 하루 종일 뛰어다녔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경선샘이 말했다.
교감은 맞장구를 치며 컵을 건넸다.
“그래도 경선샘이 중심 잘 잡아줘서 준비가 술술 되잖아요. 고생했어요.”
나는 한 박자 늦게 그들 앞을 지나며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어, 미주샘! 오늘 현장 체크 잘 됐죠?
내일 동선표는 제가 정리해서 금방 올릴게요.”
경선샘의 말에,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네. 필요 자료는 공유드렸으니, 동선표만 확정 부탁드려요.
안전요원 배치는 오늘 정해둔 대로 부탁드립니다.”
교감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미주샘, 손이 빠르다니까. 내일도 잘 부탁해요.”
그 말은 늘 같은 뜻이다.
‘내일도 사실은 당신이 다 해라.’
내 자리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오늘 작성한 체크리스트와 사진을 정리해, 공유 드라이브에 업로드했다.
업무 메신저에 요약을 올리려다, 손이 멈췄다.
[내일 행사 운영 메모]
1. 의자 110석 배치 완료(후미 통로 확보)
2. 2번 마이크 교체, 배터리 전량 신규
3. 출입구 안내 배너 위치 확정(우측 벽면)
4. 안전요원 4명 배치안(출입구 2, 무대 1, 후미 1)
5. 쓰레기 분리존 표지 부착 예정
6. 진행자 스크립트 2부 인쇄(아침 수령)
보내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새 알림이 떴다.
보고서(초안): 행사 동선 및 준비 현황 – 작성자: 박경선
파일을 열었다.
오늘 우리가 현장에서 맞닥뜨린 문제와 수정 사항이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문장 사이사이에 ‘팀과 함께’, ‘조율 완료’ 같은 단어가 눈에 띄었다.
문서 속 ‘팀’에는, 문서를 작성한 사람의 이름만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커피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삼켰다.
쓴맛이 혀를 덮고, 목으로 내려갔다.
이건 커피의 맛이라기보다 오늘 하루가 가진 고유의 맛이었다.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교무실 불이 하나둘 꺼지고, 잔업을 마친 이들이 가방을 둘러메며 인사를 건넸다.
“내일 봬요~”
그 인사에 담긴 건 각자의 평온이었다.
나는 아직 남아 내일 아침 배포할 이름표를 다시 세어 봤다.
오타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오타는 분명 내 이름으로 귀속된다.
창밖 운동장에 노을이 슬쩍 눕기 시작했다.
주황빛이 창틀을 타고 내려와 책상 모서리를 어루만졌다.
그 빛 속에서 문득 생각했다.
이 학교에서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바빴다’고 말하면 되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했다’는 증거를 남겨야 한다.
그리고 내일, 무대 위에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누가 대신 받을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다 보니 손잡이가 닿는 자리가 욱신거린다.
경선샘 자리 위에 방금 올린 듯한 새로운 보고서가 떠 있었다.
상단엔 큼지막한 제목.
[행사 준비 총괄 보고] – 박경선
나는 조용히 화면을 닫았다.
내일도 잘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그게 나의 일이니까.
칭찬은 다른 누군가의 몫일지라도.
정문을 나서자 찬바람이 뺨을 스쳤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오늘의 냄새는 땀과 테이프, 먼지와 커피였다.
그 냄새가 나를 지치게 하면서도, 이상하게도 현실감 있게 붙잡는다.
나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미련이라기보다, 사명감의 잔재.
아이들이 웃는 그 순간,
그 한 장면이 나를 붙잡는다.
하지만 내일 아침,
현관 앞에서 또 같은 말을 듣겠지.
“그 일, 미주선생님이 해주세요.”
그리고 나는 또 할 것이다.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조용히 굴린다.
땀은 마르고, 기록은 남고, 그 기록의 이름은 대개 나의 이름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
나는 내일도 체크리스트를 들고 첫 번째 불을 켤 것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