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회의는 길고, 성과는 없다

by 기억너머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교무실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말했다.

“교감선생님이 미주샘, 영미샘, 동민샘 회의한다고 부르시는데요?”

또 시작이구나.

젓가락을 내려놓기도 전에, 이미 예감은 정확했다.

‘회의’라는 말은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을 예고했다.

지명된 세 명의 교사들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광등은 이상하게 밝고, 공기는 무겁다.

지명되어 불려 간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말 잘 듣는 사람들’ 혹은 ‘일이 되는 사람들.’

결국 둘 다, 이용당하기 좋은 사람들이었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 교감의 환한 목소리가 터졌다.

“자, 우리 학교 일꾼들 다 모였네~!”

그 말은 따뜻함이 아니라, 통제의 신호, 그녀는 늘 이렇게 시작한다.

“다음 주 행사 준비해야죠? 근데 우리 경선샘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다른 샘들께 부탁하는 게 미안하대. 샘들이 좀 도와줘야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교감선생님, 그건 제가 경선샘한테 몇 번이나 도와줄 거 있냐고 여쭤봤는데, 그때마다 괜찮다고 하셨어요.”

잠깐의 정적.

그리고 교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머, 경선샘이 미주샘이 좀 어렵나 봐요? 뭐, 말 못되게 했어요? 하하하하하.”

회의실에 어색한 웃음이 퍼졌다.

“하여튼 미주샘 말할 때 보면 가끔 차가울 때가 있어.”

“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도와달라 한 적도 없는데, 이젠 ‘차가운 사람’으로 프레임이 씌워진다.

이 학교에서 진실보다 중요한 건 분위기, 그리고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은 늘 권력자다.

“경선샘이 어제 너무 힘들다고 울었어.”

교감의 목소리는 연민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미주샘이 좀 도와줘라~ 이런 거 미주샘한텐 아무것도 아니잖아.”

하하… 울었다고?

그녀가?

본인이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윗사람들 앞에선 “제가 다 준비했어요”라며 눈물까지 동원하는 사람. 결국 그 일의 수습은 또 내 몫이었다.

또 나, 언제나처럼.

내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내 안에서 조용히 한숨이 폭발한다.

도대체 이 학교엔 사람 없나? 그런데 이제는 이런 상황조차 낯설지 않다.

부조리는 반복되면 일상이 된다.

선배 교사들은 그 일상에 완벽히 적응했다.

30년 차, 28년 차, 그들은 눈을 감고 교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미주쌤이 제일 잘하시잖아요~.”

누군가 웃으며 던진다.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당신이 해라’의 완곡한 협박이다.

교감은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쵸, 미주 선생님은 손이 빠르니까~ 좀 해줘.”

손이 빠르다.

이제는 ‘노예보다 효율적이다’의 교양 있는 버전으로 들린다.

회의는 그렇게 1시간을 훌쩍 넘겼다.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결론은 항상 같다.

“좋아요~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린다’는 말의 뜻은, ‘당신이 알아서 다 해라’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정규 교사들은 커피를 들고 웃으며 나간다.

“오늘도 별거 없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회의록을 정리하고, 공문을 올리고, 행사 자료를 붙잡는다.

이 학교의 업무 시스템은 간단하다.

일은 기간제가, 공은 윗사람이,

칭찬은 아부하는 자가 가져간다.

“미주쌤~”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돌아보니 경선샘이었다.

밝게 웃는 얼굴, 그러나 그 미소는 냉정했다.

“교감선생님이 아까 회의 때 말씀하신 거 있죠? 그거 저한테 좀 나눠주시면 제가 ‘정리만’ 해도 될까요?”

정리만? 정리만이라니.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럼 원본이랑 공문 같이 드릴게요.”

그녀는 활짝 웃었다.

“역시 미주쌤! 고마워요~”

다음날 아침, 학교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보고서: 행사 준비 현황 보고

작성자: 교사 박경선

화면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내려가는 커피의 맛은, 쓰디쓴 오늘의 현실과도 같은 맛이었다.

퇴근길, 학교 정문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노을은 붉고, 학교 건물의 창문마다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는 지금 또 누군가의 공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겠지.

손에 쥔 서류 가방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종이 몇 장일뿐인데, 그 안에는 내 하루의 분노가 눌려 있었다.

이곳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곳이다.

하지만 아직은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이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미련이 아니라 사명감의 잔재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웃는 그 순간, 그게 나를 붙잡는다.

하지만 내일도 또 회의가 있을 것이다.

회의는 길고, 성과는 없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또 들을 것이다.

“그 일, 미주쌤이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