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차가운 커피의 위로

by 기억너머

행사 당일 아침 9시.

학교는 이미 분주했다.

오늘은 학부모 100명, 학생 70명이

참석하는 큰 행사였다.

행사는 오후 2시에 시작이었지만,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체육관에

모여 있었다.

인터미션 시간에 드실 간식

200인분을 세팅하고,

음향 점검, 무대 장식, 자리 배치까지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나라도 놓치면 바로 티가 나는 일.

그래서 땀을 흘릴 겨를조차 없이 움직였다.


‘담당인 경선샘은 벌써 나와 있겠지.’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오셨어요.”

누군가의 말에

체육관 안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래, 교감선생님이라도 오시겠지.’

그분도 없었다.

그렇게 땀에 젖은 작업복 차림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을 때,

11시 즈음 문이 열렸다.

말쑥한 옷차림의 두 사람이 들어왔다.

교감과 경선샘.

마치 미용실에서 막 나온 듯한

단정한 모습이었다.

우린 먼지 묻은 운동화와 엉킨 머리로

무대 장치를 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때 교감의 눈에 커피가 들어왔다.

우리가 사비로 시켜둔 커피였다.

“우리가 마셔도 되지?”

그 말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결국 그 커피는 그들의 손으로 사라졌다.

잠시 멍했지만,

결국 우린 또 사비를 털어 커피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날은 커피 한 잔조차 내 돈이

아니면 마실 수 없는 날이었다.

시간은 흘러 점심이 다가왔다.

“점심은 어떻게 해요?”

“예산이 없어요.”

그 대답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게

더 씁쓸했다.

교감은 그때 “잠깐 다녀올게요”라며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한참 뒤,

우리가 사비로 김밥과 샌드위치를 사 와

조용히 나눠 먹을 즈음,

그분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와 말했다.

“이거 맛있네~ 어디서 샀어?”

그 웃음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이없음조차 사치였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래, 이런 사람들은 평생

배고플 일 없겠지.’

오후 2시, 드디어 행사가 시작됐다.

무대 위의 조명은 따뜻했고,

분위기는 좋았다.

앞에서 사회를 보는 경선샘은

스포트라이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교감은 내빈들과 학부모들 사이를 돌며

말했다.

“이번 행사는 전적으로 경선샘이 다

기획하고 준비했어요.

우리 학교의 일꾼이에요.

진짜 수고 많았죠?”

나는 그 시간,

무대 뒤에서 간식을 나르고 있었다.

뜨거운 조명 아래서 땀은 멈출 줄 몰랐다.

손에 들린 샌드위치가 흔들리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칭찬은 늘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빛은 한 사람에게만 쏟아지고,

그 뒤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졌다.

행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학부모들은 “정말 잘 준비하셨네요~”라며

교감과 경선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미소로 화답했고,

그 사이 나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었다.

텅 빈 종이컵, 남은 샌드위치 조각,

그리고 식은 커피 몇 잔.

그게 오늘 하루의 결과물이었다.


체육관은 조용했다.

하루 종일 울리던 소리들이

한순간에 멎은 듯했다.

나는 무대 옆에 앉아 숨을 돌렸다.


허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밖으로 기울어가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뜨겁게 달궈졌던 하루가 식어가듯,

하늘은 서서히 붉은빛을 거두고 있었다.

문틈으로 스며든 바람은

차갑지만 시원했다.

어쩌면 그 바람조차

‘그래도 끝났잖아’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은 다 녹았지만,

그 차가운 커피가

내 속의 답답함을 쓸어내렸다.

얼음장 같은 한 모금이

폭포처럼 속을 타고 내려가며

묘한 위로가 되었다.

오늘은 참 억울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식어버린 커피가

내게 마지막으로 건넨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