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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Aug 30. 2022

세상에서 수납되었던 삶들, 위로가 되다.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 리뷰

최근 모마 미술관 도슨트북인 <그림들>을 읽고 학부 때 배웠던 현대미술 지식이 속속 떠올랐다. 익숙한 지식 위로 새로 알게 된 세밀한 정보가 합쳐지며 모마(뉴욕 현대미술관)의 대표작 16편을 간접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언젠가 이 책에 나온 모든 작품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책을 덮고 나서 누가 들어도 유명한 대가로 인정하는 화가들의 작품 외에 다른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도 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예술적 자극은 또 다른 예술적 자극을 갈구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러던 차에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을 소개하는 문화 소식 글을 읽었다. 미술계의 주류, 제도권 밖에서 잊히거나 조명되지 않았던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책이라니? 공교롭게도 내가 원하던 정보와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그렇게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의 문화 초대를 신청했다.

  


미술 에세이스트이자 미술 교육인인 이소영 작가는 예전부터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의 매력에 이끌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들의 삶과 작품을 조사해 왔다. 그리고 그 조사로 얻은 지식과 소감을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묶었다.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화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가 1945년에 전통적 문화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예술,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의 예술을 가리키기 위해 만든 ‘아르 브뤼 (art brut, 있는 그대로의 미술)’라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 아르 브뤼를 1972년 예술 평론가 로저 카디널(Roger Cardinal)이 영어로 번역한 말이 바로 아웃사이더 아트이다. 시간이 지나 아르 브뤼와 아웃사이더 아트는 조금씩 다른 뜻을 지니게 되었다. 영국의 테이트 뮤지엄은 아웃사이더 아트가 좀 더 넓은 의미를 지녔다며, 그 가장 큰 특징으로 ‘독학’을 제시한다. (pp. 7-8) 그리고 최근 십 년간 현대미술계는 여성, 다문화,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제도권 내의 수련과 평가 밖에서 작품을 만들었던 작가들, 아예 조명되지 않았었거나 한때 잊힌 작가들에 대한 자료가 주류 미술가들에 비해 자료가 많기는 힘든 일이다. 한국어 자료는 물론 영어 자료도 적은 화가들이 많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끈질긴 탐구심으로 저자는 무려 23명의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들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 23가지 빛깔의 삶을 읽다 보면 아웃사이더 아트에 대해 주목할만한 이유가, 현재 현대미술계가 아웃사이더 아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 외에도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들의 삶 그 자체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제도권 안의 미술가들-주로 서양 강대국의 백인 남성- 역시 개개인의 삶에서 부침을 겪었지만 조명되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삶을 읽는 것은 영 다른 기분이 들었다.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에 도판으로 실린, 처음 보는 그들의 그림을 함께 보며 그 삶에 대해 읽을 때는 기분이 더더욱 묘했다. 이 책에서 본 그림이나 조각 중에, 어느 하나 허투루 만든 작품은 없었다. 이소영 작가가 아웃사이더 아트에 빠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빌 트레일러의 작품에서 인물과 사물 안을 성실하게도 빼곡히 채운 연필 흑심 자국이 이를 보여준다. (오죽하면 그 열심인 흔적에 이소영 작가는 그의 그림 앞에서 울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역사에서 영영 지워질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청소부 일을 했던 헨리 다거는 자기가 살던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지만 그것들을 생전에 한 번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의 삶의 궤적은 사후에 작품들이 발견되며 전과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며 아웃사이더 아트, 아르 브뤼의 대표자가 되는 것으로 그려졌다. 


나치에 의해 테레진의 수용소로 끌려갔던 프리들 디커브랜다이스는 50kg만 챙겨갈 수 있던 짐 안에 생필품이나 식량이 아닌 미술용품을 가득 채워 넣었다. 아동미술 교육인이자 화가였던 그는 그 미술용품들로 수용소 안의 유대인 아이들에게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 희망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그의 이런 의로운 행동은 그가 가방에 꼭꼭 숨겨둔 유대인 아이들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소중했던 여동생을 잃은 조지아나 하우튼은 결과적으로 심령술과 예술을 접목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심령술 도구인 플랑셰트로 죽은 형제자매의 영혼과 함께 드로잉을 했다고 믿은 그는 작품활동이자 망자와의 소통 활동인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고, 그렇게 만든 작품들을 모아 직접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내게 그런 하우튼의 삶의 궤적은 슬퍼 보이기도 하고 어쩐지 아름다워 보이기도, 조금은 무서워 보이기도 했다. 마치 하우튼의 작품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곡선들처럼 기묘한 느낌으로.  



한편으로는 주로 어떤 사람들의 삶이 영영 숨겨질 뻔했는가를 고찰하게 되기도 하였다. 


알로이즈 코르바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을 했는데 그 짝사랑의 열병이 결국 그를 병들게 했다. 점점 심해지는 망상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그는 결국 정신분열증 판정을 받게 되었고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그리고 그 정신병원 안에서 종이가 부족할 때면 쓰레기통에서 재료를 주워가며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그림은 대개 망상 속에서 이뤄낸 짝사랑에 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사람의 창작활동은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솔직히 그 시절에 그것을 진지하게 ‘창작활동’으로 봐 줄 사람이 많았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코르바스의 그림은 1936년 새로 부임한 병원장과 의사 등의 관심을 받았고, 그들이 코르바스의 그림 보존에 참여해 후일 그 그림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현대미술 부문에서 여성의 누드가 있는 그림은 85%를 차지하지만 여성 화가의 그림은 5%에 불과한 점을 짚어냈던 게릴라 걸스와 그들의 퍼포먼스를 기억하는가. 이처럼 여성 화가의 존재 역시 남성 위주의 미술계에서 지워지고 밀려나기 쉬웠다. 2016년 영국의 한 갤러리에서는 한 예술가가 죽은 지 70년 만에 그 예술가의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은 ‘위니프레드 나이츠의 잃어버린 재능’이었다. 나이츠는 21세의 어린 나이에 로마 교황상을 받은 첫 번째 여성 화가였으나 살아생전 단 한 번의 개인전도 열지 못했다. 이 유능하고 독창적인 화가에 대해 옥스퍼드 전기 사전은 누군가의 아내라는 설명을 남길 뿐이었다. 나이츠의 대표작 <홍수 (Deluge)>를 보고 나는 이 작품이 현대의 작품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인물의 독특한 표현과 색감, 대홍수에 대피하는 긴박한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이츠의 <홍수>는 성경 속의 홍수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림 안에 방주를 직접 그려 넣지 않음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난의 위협감이라는 시대 보편적인 정서를 이끌어낸다. 


인종이라는 키워드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뉴욕 현대미술관(모마)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 흑인 예술가’인 조각가 윌리엄 에드먼슨을 소개하며 대학에서 흑인인 조각가를 한 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저자는 자신이 배운 서양미술사 속 조각가는 미켈란젤로, 부르젤, 로댕, 브랑쿠시, 자코메티 같은 계보로 이어졌을 뿐이라고 말하는데, 그 문장을 읽으며 크게 공감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자주, 백인 남성들의 계보를 외우고 이해했는가. 에드먼슨은 노예의 자녀이자 흑인이었고 태어나 단 한 번도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비록 이제 그의 조각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모마)에 전시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흑인 조각가의 계보, 동양인 조각가의 계보, 라티노 조각가의 계보 등등은 얼마나 낯설고 생경한지를 떠올려보면 마음이 한구석이 조금 착잡해지기도 한다.  



아웃사이더 아트에 끌려 책을 집필한 이유로 저자는 자신의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이야기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억될지 혹은 사라지게 될지를 정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린 일이 아니다. 만약 특별한 업적을 남긴다면 기억될 가능성이 커지겠으나 그렇다 해도 완전히 우리 손에 달린 문제는 아니다. 의로운 삶을 살았어도 훗날 자료가 소실될 수도 있고, 어쩌면 자료가 남지 않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당장 이 책에 남은 23명의 예술가의 경우를 보아도 누군가는 ‘어떤 계층, 성별, 인종의 사람이기 때문에’ 지워지거나 잊혀졌다. 


그래서 기록과 발굴, 역사의 재발견이란 너무나 중요하다. 사어가 될 뻔했던 인생이 다시 빛을 만나게 돕는 작업인 셈이다. 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80억에 달하는 현재 인류 개개의 삶을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삶의 롤 모델과 사례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 지금껏 주류 문화에서 조명된 삶만으로는 이 수많은 인생에 공감과 위로, 그리고 앞날을 살아가게 도와줄 실마리를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대로 하찮은 삶이란 없다. 하찮은 예술 또한 없다.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살아나가는 것 외에도, 우리가 서랍 속에 들어 있던 과거를 꺼내 다시 밝힐 수 있다는 사실로도 우리는 우리 존재의 지워짐에 대한 불안감을 다독일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시간과 편견, 사회에서의 소외 속에 수납되었던 삶을 우리가 사는 시공간으로 다시 끌어와 우리에게 그 삶을 전달한다. 그 행위에 아웃사이더 아트에서 받은 위로를 함께 동봉하여. 


책이라는 편지 안에 정성스레, 곱게 들어 있는 위로를 받아먹으며 생각했다. 내 경우 작가의 마음속 아웃사이더 아트 자리에 들어가 있던 것이 바로 음악이었다고. 몇 곡의 음악과 그 노랫말들이 내 인생의 암흑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게 지지해 주었다고.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을 읽어가는 동안 그러한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싶어 썼던 음악 에세이 몇 편이 떠올랐다. 그 글을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강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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