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 리뷰
1. 다락방의 미친 여자
나의 경우 문학 속 ‘미친 여자’하면 떠오르는 것은 세상에 설 곳이 없어서 미쳐버리는 여자의 이야기다. 소외와 고립 속에서 자기 열망을 적절하게 세상에 내보이며 태울 수 없어 내면의 불길로 자기를 태우는 여자들. 그 모습은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괴물 같이 그려지기도, 더없이 가련하게 그려지기도 하나 사실 미쳐가는 과정을 거친 한 인물이 그렇게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다룰 책 제목이기도 한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은 어떤 여자들인가. 이 책에서 저자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만들어가는 것은 19세기 여성 문인 텍스트의 계보로, 여성 문인들이 각기 다른 글을 썼으나 그들의 글을 관통하는 ‘여성 문인들만의 전통’이 있음을 주창한다. 그 전통이란 글쓰기, 작가 되기, 심지어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조차 여성에 ‘맞지 않는다는’-어울리지 않는다는 표현 정도여도 속이 터질 텐데!- 사고가 만연하던 시대에 ‘작가로서’ 글을 써 나간 여성 문인들의 텍스트 속에 잠재된 그들의 불안과 그로 인한 분열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작가 됨에 대한 불안감과 분열은 캐릭터의 분열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온순한 여성 캐릭터가 있다면 그 반대급부에-혹은 그녀의 바로 뒤 그림자에- 괴물이자 마녀 같은 미친 여자가 있다. 집 안의 천사와 자기 욕망을 가진 마녀라는 분열된 캐릭터성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아니면 한 여성 인물의 파멸 과정을 그리며 한 인간 내면의 분열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여성 인물들은, 그녀는 갇혀 있다. 허리를 무자비하게 조이는 코르셋 안에, 다락방이라는 고립된 공간에, 가부장제의 구속 아래에. 정신적으로 분열된 채로 갇혀 있기까지 한 숱한 여성 캐릭터들이 19세기 여성 문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그리고 주석을 제하고도 천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그 인물들을,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쓴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문학관을 탐구하고 분석하며, 하나의 유의미한 선으로 이어나간다. 책을 읽으며 '미친 여자'는 왜 미쳐버렸고 그 미친 여자들을 만들어 낸 여자들은 누구였는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페미니즘 시학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여성 문인의 텍스트 속 여자들은 사실상 모두 무엇인가에 구속되어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백설 공주 동화의 비유를 통해 논증한다. (동화란 무의식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백설 공주 이야기는 다들 알 것이다. 계모인 새 왕비가 의붓딸의 아름다움을 질시하여 백설 공주를 몇 번이고 죽이려 했고, 공주는 독 사과를 먹고 쓰러졌다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동화를 상징적 의미로 읽어나가는 저자는 백설공주의 친모인 첫 번째 왕비와 계모인 두 번째 왕비를 같은 인물로 읽는다. 첫 번째 왕비가 바느질을 하다 손가락을 찔려 붉은 피를 흘리는 장면이 상징하듯, 자신의 섹슈얼리티(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역사적 구성물이며, 불평등한 권력 관계의 산물인 성에 관련된 행위, 태도, 감정, 욕망, 실천, 정체성 따위를 포괄하여 이르는 말 [네이버 국어사전])를 받아들이는 순간 가부장의 인습과 통제 아래 들어가 그녀 자신은 죽고 두 번째 왕비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이 변해버린 왕비가 가진 마법의 거울은 말을 하는데, 주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평가해준다.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당연히 가부장의 목소리이고, 남편인 왕의 목소리이다. 결국 마법의 거울의 목소리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인 왕비가 가부장제의 가치관을 아예 내면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내면화는 왕비를 구속한다. 그녀가 자신의 딸인 백설공주를 죽이려 드는 이유는 자신이 죽여야 했던, 변화 전의 모습을 어린 딸이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백설 공주의 눈처럼 하얀 피부, 수동성, 세상을 모르는 모습은 그녀를 생기 없는 예술작품처럼 만든다. 저자에 따르면 이 ‘생기 없는 예술작품’이란 먹기를 거부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거세하는 등 자기 자신을 죽은 것처럼 만들어가는 여성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쨌든 숲으로 내던져진 백설 공주는 살기 위해 무언가를 배우고 익혀야 했을 텐데, 그런 그녀가 숲-일곱 난쟁이의 집-에서 익힌 일이 수렵이나 채집이 아니라 청소와 요리 등의 가사란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집 안의 천사가 될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가는 이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딸은,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행위로 옮기고 싶어 하는, 자기 욕망을 내보이고 싶은 왕비에게 존재론적인 위협이 된다. 왕비의 욕망은 자기 딸인 백설 공주를, 자신의 이야기를 가로막을 자기 내면의 수동적인 자아를 제거하는 것으로, 어찌 보면 두 사람은 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노파로 위장한 '마녀-왕비'는 변장술, 거짓말, 빗과 코르셋, 독 같은 ‘여성적인’ 방식이나 도구를-이를테면, 왕비는 공주를 칼이나 몽둥이로 죽이지 않는다- 써서 공주를 죽이려 한다. 독 사과를 먹고 쓰러진 백설 공주는 유리로 된 관에 들어간다. 공주의 몸을 구속하는 이 유리 관은 여왕의 거울의 첫 번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여 다른 존재로 변한 왕비처럼, 백설 공주는 한번 죽었다가 왕자의 개입으로 다시 눈을 뜬다. 공주도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유리 관에 갇혀 있었던 그녀는 왕자와 결혼해 새로운 왕비가 되고, 가부장의 목소리를 내면화한 여왕의 거울을 갖게 될 것이며, 그 목소리에 구속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주를 죽이려 들었던 왕비는? 애석하게도 그녀의 역할은 이제 이야기에서 없어져 버렸다. 공주는 죽었다가 부활했고, 새신부이자 새 왕비가 되기에 부족함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왕비의 자리에 새 왕비가 될 공주가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왕비에게 준비된 결말은 이야기에서의 퇴장, 즉 죽음뿐이다.
상징적이고도 심리학적으로 다시 읽게 된 백설공주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바는 여성들의 역할이 가부장의 목소리를 내면화한 여성과 내면화하게 될 여성, 자기 열망을 거세하지 않는 ‘미친 마녀-여자’와 순진하고 수동적이며 가정적인 ‘집 안의 천사-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는 여자와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 여자라는 두 가지 역할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천사의 자리에 서기도 하고, 성인(聖人)이 되기도 하며, 왕이나 영웅일 수도 있고 악당일 때조차 이야기를 다채롭게 가질 수 있는데, 가부장 시학 아래 여성의 역할이란 이야기가 있는 여자와 없는 여자, 이 단둘일 뿐이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자기 이야기를 가지는 여자는 마녀이며 괴물적이고 악마적이라 분류되었다.
이것이 비단 이야기 속 여성만의 문제일까? 이에 관해 책 본문의 문단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오로라 리나 메리 엘리자베스 콜리지 같은 여성 작가들이 남성 텍스트의 감옥에서 여성의 펜으로 탈출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 출발점에서 자신을 ‘천사-여자’와 ‘괴물-여자’로 번갈아가며 정의하는 모습을 목도할 것이다. 우리는 또 백설 공주나 사악한 여왕처럼, 이들의 초기 욕망이 양가적임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유리 관 속에서 숨 막히게 꼭 끼는 코르셋으로 자기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조이거나, 거울 밖으로 나와 불같은 죽음의 춤을 추어 스스로를 파괴하라고 유혹받는다. 그러나 천사와 괴물이라는 한 쌍의 이미지가 제시하는 걸림돌이 가로놓여 있었어도,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과 불모성에 대한 공포로 고통을 받았어도, 여성 작가들은 작품을 산출했다. (pp. 136-137)
3. 다락방에서 미친 여자를 만들어 낸 또 다른 미친 여자들
이 책에서 말하는 미친 여자들의 정체란 궁극적으로 19세기 여성 문인들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조지 엘리엇, 에밀리 디킨슨 등이 이 두꺼운 책 안에서 거론된다.
여성에게 부여된 특성이란 원하지 않아도 사회적인 찬미와 강요를 받는 모성, 가녀리고 가냘프고 유약한 것, 혹은 말로 상대를 조종하고, 그래서 음침하고도 기만적인 것, 가부장적인 문화(문명)에 비해 열등하다고 치부되는 자연적인 것이기만 하던 시절에 ‘여성에 걸맞지 않은’ 창조적인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으니 그 괴리감이 오죽했을까.
더군다나 여성 작가들의 글쓰기 공간은 존중받고 독립된 서재가 아닌 고립된 다락방, 혹은 사람들이 드나들어 집중력을 해치는 응접실이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도, 남성 작가들의 계보에서 여성 문인들의 입지는 광장이나 연단이 아닌 다락방, 연결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확장되지 않는 다락방에 국한되었다. 그 안에서 자기 분열적인 양상을 보이면서도, 그들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 선배의 문학적 주장을 재생산하기도 하고, 여성 작가로서의 한계점을 대외적으로 인정하며 작가 자신이 안전한 글쓰기 영역을 조성하려 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러 남성의 텍스트를 오독하거나, 기존의 텍스트를 반대로 읽어 전복하기도 했다. 이 다양한 방책들 사이에서, 여성의 분열 혹은 분열하는 여성이 등장했다.
이 엄청난 분량의 책에 나타난 모든 내용을 이 지면에서 다루기는 힘들기 때문에 가장 인상 깊었던 방식을 택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불안과 분열의 감각을 겪으면서도 작가 되기를 멈추지 않았던 (자매라고 부르고 싶은) 여성 선배들에게 그들 행적의 의의를 언급하며 감사를 표해야겠다.
그리하여 앤 핀치와 앤 엘리엇부터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자부심 강한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 텍스트라는 유리 관에서 나와 여왕의 거울을 폭파했을 때, 오래전 침묵 속에 추었던 죽음의 춤은 승리의 춤, 언어를 향한 춤, 권위의 춤이 되었다. (p. 137)
4. 캐서린-히스클리프의 양성성과 천국에의 추락
제인 오스틴이 자기 글의 성격을 원대한 것이 아니라 작은 상아를 조각하는 것이라 공공연히 말하고 자기 소설 속에서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 인물에게 벌을 내려 여성 작가로서의 안전성을 확보했다면, 메리 셸리는 남성 작가인 밀턴의 <실낙원>의 의미를 자기식으로 재현해냈다. 셸리는 밀턴의 <실낙원>을 전복하지 않았고, 밀턴 텍스트의 여성 혐오도 재생산했다. 그러나 오스틴의 선택이 여성 작가로서 자기 작품을 계속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처럼, 셸리의 선택도 여성 작가의 계보를 만드는 데에 공을 세웠다. 밀턴과 블레이크로 이어지는 <실낙원>의 남성 계보와 달리 여성 작가가 뻗어낸 가지가 생긴 것이다. 바로 ‘밀턴의 딸들’이라는 가지이다.
이 <실낙원>에 대한 반향은 또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다. ‘밀턴의 충실한 딸’로서 셸리가 저술한 <프랑켄슈타인>은 밀턴의 ‘신-천사-아담’, ‘사탄-죄-이브’의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비록 괴물의 창조자인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남성이지만 그의 불온한 창조성은 ‘여성적인’ 창조성이라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에밀리 브론테는 <실낙원>의 지옥과 천국을 전복시켜 버린다. 개인적으로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작품 분석이 몹시 인상 깊었으므로 이 장에서는 <폭풍의 언덕>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양성성과 이 작품 자체의 전복적인 성격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폭풍의 언덕> 이야기의 모든 시작은 워더링 하이츠의 늙은 언쇼 씨가 자식들에게 약속한 선물(힌들리의 바이올린과 캐서린의 채찍) 대신 집에 ‘고아 집시 소년’ 히스클리프를 데려온 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 받지 못한 채찍 대신이 된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가르치고, 이 소년은 늙은 언쇼의 장자이자 캐서린의 오빠인 힌들리를 견제하여 캐서린의 힘이 된다. 캐서린이 말하길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 ‘나보다 더 나 같은 사람’이며 둘은 함께 있음으로써 양성적인 존재가 된다. 두 존재의 결합으로 인해 워더링 하이츠의 언쇼 가는 밀턴적 지옥의 동등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캐서린-히스클리프에게 가부장적인 위계가 흐릿한 이 저택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천국 같은 유년기도 영원할 수는 없다. 아버지 언쇼의 죽음으로 아들 언쇼가 그 권력을 양도받게 되기 때문이다. 장자 힌들리는 아버지의 가부장 권력을 물려받자마자 저택 내 히스클리프의 위치를 격하시킨다. 여기에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있는 린턴 가에 간 캐서린이 그 집의 수컷 불독에 다리를 물리는 사건이 발생하며 캐서린의 추락이 시작된다. 저자는 이 장면을 캐서린이 섹슈얼리티를 경험함으로써 소녀에서 숙녀가 되어야 하는, 유년기 캐서린의 자아가 거세되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읽는다.
사춘기 소녀가 피를 흘리는 장면은 성적인 암시를 분명히 드러낸다. 다리를 절게 만든 부상도 마찬가지다. 그 부상은 오이디푸스, 아킬레스, 피셔 킹의 이야기에 나오듯 거의 항상 상징적 거세를 의미한다. (...) 이 단순하지만 폭력적인 에피소드의 이미지들은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캐서린이 성숙한 여자의 섹슈얼리티로 내던져짐과 동시에 거세되었음을 암시한다. (pp. 495-496)
린턴 가에서 캐서린은 간호와 숙녀로서의 ‘훈육’을 받으며 ‘여자처럼’ 되어야 했다. 린턴 가의 따뜻하고 잘 장식된 집, 세련된 응접실을 처음 볼 때 캐서린-히스클리프는 이곳이 천국 같다고 느꼈으나 곧 그 천국은 그들의 천국이 아니었음을 절절히 깨닫게 된다. 날 것 그대로의 워더링 하이츠는 이브와 사탄의 열망처럼 본질적으로 반위계적이고 평등했다면,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는 서구 문화가 대대로 하늘의 섭리로 규정해 온 위계적인 존재의 사슬을 재생산한다.(p. 498) 캐서린이 사회적으로 억압 당하며 변화를 겪는 동안 히스클리프 역시 서러운 변화를 맞이한다.
캐서린이 숙녀로 추락하는 동안 히스클리프 역시 여성의 무력함에 해당하는 위치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여자 되기가 타락이라면 여자처럼 되기는 더 심한 타락임을 정확하게 배운 것이다. 따라서 밀턴의 이브가 이미 타락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 있는 선택도 할 수 없었던 것 같이 (물론 밀턴은 이브의 선택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캐서린에게도 진정한 선택이란 없다. 문화가 본질적으로 가부장적이라면 여성은 타락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은 타락할 운명이기 때문에 이미 타락한 것이다. (p. 504)
요컨대 캐서린이 겪는 추락은 천국에의 추락이다. 워더링 하이츠라는 동등한 지옥에서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라는 가부장적 위계가 확고한 천국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실상 그녀에게 천국이란 워더링 하이츠라는 지옥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브론테는 밀턴적 천국과 지옥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추락을 겪은 캐서린의 정신은 서서히 분열되어 간다.
워더링 하이츠를 떠났던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이 에드거 린턴과 결혼한 후 6개월 만에 돌아오면서, 캐서린 내면의 분열은 격화된다. 그녀는 먹기를 거부하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도 창문을 열게 하고,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며, 육신은 병들어간다. 창턱에 성이 바뀌는 자기 이름을 거듭 적기도 한다. 캐서린 언쇼, 캐서린 린턴, 캐서린 언쇼…. 숙녀로의 강제적인 사회화 후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에 절망하는 것이다.
히스클리프, 그에 대한 캐서린의 ‘사랑’, 더 심오하게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결합이 나타내는 자율성의 욕망을 의미하는 캐서린의 채찍은 이제 그녀를 향한다. 캐서린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은 세상을 채찍질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채찍질해야 하기 때문이다. (p. 517)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아의 최종적인 분열인 출산을 겪으며 캐서린은 캐서린 2세를 낳고 결국 죽게 된다. 페미니즘 시학에서 읽었던 왕비의 죽음을 다시 보는 기분이다.
브론테가 그 의미를 전복한 밀턴의 천국과 지옥, 이브에 대해 논할 때 히스클리프의 ‘여성성’을 언급하는 부분 또한 흥미로웠다.
히스클리프가 ‘여성적’이라는 주장은 처음에는 미친 소리처럼, 또는 터무니없게 들릴 것이다. (..) 우리가 알고 있듯 에드거는 분명히 연약함에도 사실은 가부장적이지만, 히스클리프가 차남의 남성성이나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이단아와 같은 대안적인 남성성에 해당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에드거가 기존의 천사의 방식으로 남성적이듯, 히스클리프도 분명 사탄적인 추방자의 방식으로 남성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좀 더 뿌리 깊은 연상의 측면에서 (차남, 서자, 악마들이 여성들과 연합하여 천상의 폭정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고아는 여성이고 상속자는 남성이라는 점에서, 육체는 여성이고 정신은 남성이며 대지는 여성이고 하늘은 남성이며 괴물은 여성이고 천사는 남성이라는 점에서) 히스클리프는 ‘여성적’이다. (p. 531)
오래 전에 <폭풍의 언덕>을 읽을 때는 전혀 생각도 못 한 지점이라 이 해석을 염두에 두고 다시 <폭풍의 언덕>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사실 몹시 읽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 또한 19세기 후반 다른 여성 작가들도 ‘밀턴의 악령과 싸우면서, 이브의 억누를 수 없는 의지를 말살하겠다고 위협했던 가부장제와 그에 대한 여성들의 대응 수단이었던 마녀 같은 분노를 검토했다’고 하니 다른 작가들의 책도 최대한 찾아 읽고 싶은 것이다.(p. 552)
캐서린의 죽음 후, 작품의 후반부를 해석하는 부분도 매우 흥미로우니 <다락방의 미친 여자> 3부 8장에서 그것을 확인해보길 바란다.
소위 ‘벽돌책’이라 할 만큼 두꺼운 책이었다.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등 이미 읽어 본 작품의 분석을 따라가기는 비교적 수월했으나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사원> 등의 생소한 작품은 전자에 비해 충실한 이해를 더디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모르는 작품이 있더라도 책 본문에서 대략적인 줄거리와 인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읽기에 큰 무리는 없다.
다만 문학적 지식이 방대할수록 이 책을 독해하기에 수월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예컨대 이 책에서 자연스럽게 수식어로 쓰이는 ‘블레이크적인’, ‘바이런적인’ 같은 어휘들로 볼 때 저자들은 예상 독자가 문학에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 같다.
빠르게 읽어가는 문장, 천착하며 읽는 문장이 번갈아 나왔으나 읽는 이를 잠시 멈춰 서게 만든 문장도 있었다. 그건 이 책의 한계점을 느낀 부분이기도 했다. 해당 부분은 본래의 자국어와 식민지 가해국의 언어 둘 다를 사용하는 경우에 비해서, 영어만으로 글을 썼던 여성 작가들은 구사하는 언어가 하나뿐이라서 작품에서 언어를 더 교묘하고 정교하게 써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짧게 지나가는 부분이었으나 이 문장에는 솔직히 화가 났다. 식민지배를 당한 나라들의 경우 본래의 자기 나라 언어를 쓰기만 해도 처벌당하던 역사를 지녔음을 전혀 몰랐는가 싶을 정도였다. 본래의 언어를 금지당하거나 그 언어가 파괴 당하는 일을 겪었던 나라의 사람으로서는 불유쾌했다. 이중 삼중의 억압 아래에서, 피식민지의 여성이 자신을 ‘여성 작가’로 정체화하며 살기를 분투하는 것이, 구사하는 언어가 하나를 넘어서 과연 더 쉬웠겠는가?
다소 격앙된 어조가 되었으나 이 부분을 제외하고선 나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이 흥미로웠고, 크게 공부가 되었음을 인정한다. 젠더나 인종, 다양성 문제에 관한 이 책의 시대적인 한계에 대해서는 저자들이 서문에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바, 한 권의 책이 모든 문제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과거 여성 작가들의 유산을 가부장 문학계의 가장자리에서 메아리치게 두지 않고 하나의 계보로 만들어 출판 당시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독자들의 사고를 확장시켰다는 혁혁한 의의가 있다. 그리고 저자들이 수긍한 비판의 경우 서문에 소개하여 정보와 사고의 보완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확장이라는 가치를 만들어냈다.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작업이 아니었다면 이 방대한 자료를 한 권의 책으로 손안에 편하게 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