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조선 미술관> 리뷰
과거 미술사를 보면 문화를 선도하는 나라의 미술 양식이 인접 국가의-때로는 훨씬 더 먼 나라까지-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다양성과 개인의 서사를 중요시하는 현대 문화에서도 유행을 만들어내고 이끄는 거점들이 있다. 다만 그 거점이 근세 이전에 비해 훨씬 유동적이고 빠르게 변하며 다양해졌다는 차이가 있다. 근세 이전 미술에서 이 문화적인 거점은 지금보다 더 고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어떤 나라의 미술 양식을 본받는 것이 권장되다 못해 화폭 위의 고상한 원칙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미술은 자기만의 것을 어떻게 그려냈느냐가 더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문화를 선도하던 양식이 여러 나라에서 유행했다고 해서 사실은 그것을 그대로 베끼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각 나라, 지역마다 자기식으로 소화하고 재해석한 흔적을 눈여겨보면서부터 이런 흐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오늘날에는 이러한 문화적 재해석과 접목의 능력은 물론 자문화 고유의 것을 만들어낸 역사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늘어났다. 자문화 고유의 것이라 함은 살아가는 곳에서 실제로 보이는 산천과 풍경, 복식, 풍속, 의식 등을 의미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미술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간송미술관 연구원으로 일했던 고미술 해설가이자 전시기획자인 탁현규 작가의 <조선 미술관> 역시 문화 절정기의 ‘자기 것을 그린 조선 미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조선의 문화 절정기, 흔히들 말하는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 하면 영조, 정조 임금의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우리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 때는 조선 오백 년 가운데 후반부인 17세기 이후부터이다.(p. 8) 따라서 이 책 역시 영정조 시대의 풍속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우리 것'이라는 코드와 함께 숙종과 영조 대의 궁중기록화까지 탐구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전시 기획자로서의 작가의 이력이 녹아들어 전시회를 거니는 듯 만들어졌다. 책의 1부, 2부는 전시장처럼 1관, 2관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 아래 중간 목차는 몇 번째 전시실이라는 식으로 구분되었다. 1관은 조선의 풍속을 그린 풍속화를, 2관은 궁중기록화를 다뤘다.
풍속화는 말 그대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17세기 전까지는 이런 풍속화를 그려도 그림 속 인물들이 중국적인 요소와 함께 중국 배경 안에 서 있었다. 그러다 ‘조선 생각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풍속화 속 인물들이 조선의 풍습 안에서 조선 건물과 자연을 배경으로 두고 조선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를 실제의 경치를 그렸다 하여 진경풍속(眞景風俗)이라 부른다.
진경풍속은 선비 화가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처음 담으면서 시작되었고 소재를 평민들의 삶까지 넓히면서 완성되었다.(p. 12) 조선의 그림이 진정 조선의 풍광을 담게 된 계기는 사대부화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이다. 이건희 컬렉션 소장품으로 또 한 번 대중의 관심을 받은 <인왕제색도>의 화가가 바로 정선이다. 정선의 대표작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선은 중국의 산이 아닌 조선의 산을 그렸다. 중국화 기법으로 우리 산천을 그리기에 걸맞지 않으니 정선은 실제로 조선의 산천을 답사 다니며 우리 산과 강에 맞는 기법을 발굴하고자 새로운 변화들을 시도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정선 <인왕제색>)
이런 정선의 정신이 선비 화가 조영석의 진경풍속이자 양반 풍속화로 이어졌고, 조영석이 완성한 진경풍속은 다음 세대 화원화가의 붓끝으로 옮겨 가 화려한 꽃을 피웠다. 이 화원화가들의 대표가 우리가 익히 아는 단원 김퐁도와 혜원 신윤복이다. 김홍도 풍속화는 태평성대를 이룬 조선 군주에게 백성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증거자료였다. 한편 신윤복의 양반 풍속화는 양반들의 놀이 문화를 통해 문화 절정기의 호사스러움을 드러내었다.(p. 13)
정선은 율곡 이이의 일화를 소재로 한 <사문탈사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다)>를 66세 때 한 점, 80세 때 한 점하여 총 두 점 그렸는데, 이 두 그림을 비교하면 조선의 그림이 진경풍속화로 나아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주제가 율곡 이이의 일화로, 주제가 조선의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66세 때 그린 <사문탈사>에서 율곡은 중국 물소를 타고 있다. 80세에 그린 동일 주제의 그림에서 율곡은 중국 물소가 아닌 조선 황소를 타고 있다. 이는 중국 요소로 그림을 그리던 관습에서 조선 고유색 화풍이 더더욱 강해지는 과정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김홍도의 인물 풍속화 중에는 선비의식을 다룬 것들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포의풍류 (벼슬 없는 선비의 풍류)>라 할 수 있다. 방 안에서도 의관을 정제했으나 발 만큼은 버선발이 아닌 맨 발로 그려진 이 선비는 종이창과 흙벽으로 이뤄진 소박한 집에 사는 벼슬하지 않는 선비이다. 그림 전반적으로 한적한 멋스러움과 편안함이 흐른다. 그러나 선비 옆에 늘어진 기물들은 그 자체로 귀한 책이나 중국에서 들여온 골동기물 등으로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마음에 안빈낙도의 이상을 뒀으나 고급품과 사치품을 곁에 두는 양반 계급의 생활상이 함께 드러나는 일면 아이러니한 작품이다. 바닥에 놓인 칼은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이 그림은 김홍도 자신의 ‘관념적인’ 초상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중인 출신인 김홍도가 자신을 선비의 모습처럼 그려 사회적 지위 상승에 관한 심리적 욕망을 담았다는 해석이 있다. 실제로 그림 속 선비처럼 김홍도는 생전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홍도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지방관에 오르기도 했다. 김홍도 시절의 중인들은 신분이 눈에 띄게 높아졌고, 중인들도 양반들과 같은 선비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김홍도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고, <포의풍류>는 김홍도의 자화상이자 당시 선비 의식을 갖춘 중인들을 상징하는 초상화라 할 수 있겠다.(p. 28) (여기서 신분 상승 욕구가 컸고 실제로 귀족 지위를 얻은 17세기 스페인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다.)
혜원 신윤복의 <납량만흥 (무더운 여름철, 시원함을 느끼며 흥에 취하다)>은 그림의 중심이 되는 두 인물의 선이 너무나 아름답다. 두 사람은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산 속에서 악공들을 거느리고 춤을 추는 선비와 기녀이다. 신윤복은 <미인도>를 위시하여 아름다운 여인들 그림으로 유명한 만큼, 여인을 잘 그리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풍류를 즐기는 선비 또한 멋들어지게 그렸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선비의 도포 자락과 소매는 특유의 우아하면서 호방한 맛이 있다. 그러나 그림 한 편에 앉은 해금 주자의 언짢은 듯한 표정에서 이 우아한 춤판 역시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미묘한 눈짓과 표정으로 그림 안에서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신윤복의 특기이다. <이부탐춘 (과부가 봄빛을 즐기다)>에서 신윤복은 양반가 과부가 마당에서 개 한 쌍의 짝짓기를 목격하고 상상-아마도 춘정이 어린-의 나래를 펼치는 장면을 그렸다. 익살맞으면서도 한 번 더 깊게 생각하면 사실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금지당한 여인의 딱한 신세가 보인다. 자기 생각에 빠져드는 젊은 과부와 혹시라도 누가 볼세라 그런 마님을 말리는 몸종. 두 사람의 눈빛이 단순한 필치로 표현되었으나 그 표정에서 상황과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져 신윤복의 솜씨에 다시 감탄하게 된다.
지금까지 양반이 주인공인 양반 풍속화에 대해 논했으나 서민이 주인공인 풍속화 역시 단단하게 존재한다. 정선이 그린 <어초문답 (어부와 나무꾼이 묻고 답하다)>은 중국 유학자의 책 <어초문대>에서 나온 소재로, 중국 주제에 그림 속 인물들도 중숙 복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선은 이 주제를 화폭에 옮길 때 어느 정도 조선화하여 그렸으니 그 단적인 예가 조선 나무꾼의 지게이다. 중국 나무꾼은 기다란 막대기인 멜대를 사용했고, 지게는 조선에서만 사용하던 물건이다. 이렇게 <어초문답>에는 중국을 소화하여 조선화시킨 시도가 보인다.
고사에서 비롯한 서민 그림 말고도, 조선에는 조선 백성의 실생활 풍경을 담은 풍속화도 많았다. 예를 들어 김홍도의 <기우부신 (소 타고 나뭇짐 지다)>은 나뭇짐을 잔뜩 해 온 아이가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적인 장면을 멋스러운 그림으로 탈바꿈해 놓았다. 조선 아이가 지게를 지고 황소를 타며 조선의 자연을 거니는 풍경은 조선의 고유색이 여과 없이 드러난 작품이다. 신윤복의 <노상탁발 (길거리 탁발하는 스님과 지나가던 기생들)>의 경우 조선시대 스님들의 길거리 탁발 같은 생활상과 스님, 기생, 양반 등 다양한 조선 인물들의 복식을 볼 수 있다. 기생 무리 인물들의 각기 다른 눈빛과 표정에서 완성되는 신윤복표 감정선도 빼놓을 수 없다.
조선 후기 진경풍속화는 민간 풍속의 기록과 문화 절정기의 평안함, 풍부함은 물론 사회고발적 성격까지 띠었다. 이처럼 진경풍속화는 조선 고유의 것을 화폭에 그려 넣은 문화 자부심의 면에서도, 심미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나지만 소재와 주제가 이토록 다양하다는 점에서 또 한 번 풍성한 가치를 지닌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풍속화와 더불어 조선인들의 삶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이 공공 모임을 그린 기록화이다.(p. 156) 책에서 소개하는 궁중기록화는 숙종대와 영조대에 있었던 기로소 입소 잔치에 대한 것이다.
기로소(기로사 혹은 기사라고도 하였다)에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 문신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관료사회에서 가장 영예로운 모임이었다.(p. 162) 왕은 신하들과 달리 60세가 되면 기로소에 들어갔다. 숙종이 세자와 두 왕자의 청을 받아들여 1년 일찍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70세 이상의 기로신은 모두 열 명이었고 당시 기로신들은 이러한 국가 경사를 그림과 글로 남겼다.(p. 162) 그렇게 탄생된 것이 《기해기사첩》이다.
숙종의 기로소 입고 관련 행사는 크게 다섯 장면으로 나뉜다. 첫 번째가 <어첩봉안도>이다. 임금의 존호를 적은 첩인 어첩을 기로신들이 가지고 경덕궁에서 기로소까지 행차하는 모습을 담았다. 참고로 기로소는 오늘날의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행렬의 인물 구성과 역할 분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경사스러운 날에 각 계층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어첩을 어떤 가마에 올려 이동했는지 아주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왕실 행사의 세세한 기록이기 때문에 얼마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했던 의궤전도 떠올랏다. 작가는 행차를 구경하는 백성들의 모습 중에 황소와 있는 인물들을 언급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조선 그림 속 소 가운데 가장 이르게 나타난 황소로 숙종 시대에 이미 그림 속 소가 황소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p. 166) 이는 앞서 본 정선의 <사문탈사> 속 황소에 비해 36년이 빠른 출현이다.
이후 행사는 기로신들이 경덕궁 숭정전 마당에 모여 임금에게 축하 인사를 드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그림이 <숭정전진하전도>다. 숭정전 마당에 깐 박석, 숭정전 건물 양식 등을 볼 수 있고 행사가 있을 시에 전각 앞에 차일을 피고 돗자리를 깔아 자리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화첩의 기록 안에는 기로신들의 이름과 관직, 나이 등이 다 적혀 있어 기록의 가치를 높인다.
경현당에서 임금이 기로신들을 위한 잔치를 베푸는 장면은 <경현당석연도>에 해당한다. 궁궐에서 임금이 베푸는 잔치인만큼 이 화첩에서 가장 화려한 장면이 아닐까 한다. 일월오봉병의 아랫부분과 술을 담은 용무늬 청화백자에서 왕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어진을 그리는 게 아니라면 이런 기록화에서 조선시대 왕의 존재는 초상이 아닌 일월오봉병으로 그려졌다. 행사를 위해 궁인들과 무신들, 그리고 기로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도열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붉은 옷을 입고 악기를 든 악공들 앞에 오방색의 옷을 입은 무동들이 보인다. 또한 처용무를 추는 무인들이 정적인 그림에 동세를 더한다. 저자는 이 그림에 대한 설명과 함께 기로소 잔치에 올려지는 술이 몇 잔인지, 무슨 춤이 공연되는지 등을 자세하게 소개해 놓았다.
<봉배귀사도>를 통해 기로신들이 왕이 하사한 술잔을 받들어 기로소로 오는 장면을 보았다면 다음은 <기사사연도>를 볼 차례다. 임금이 기로신들을 위해 궁궐에서 잔치를 한 번 열어주고나서 악공과 무용수들을 기로신들 편에 보내 기로소에서 한 번 더 잔치를 즐기도록 해 준 것이다. 경현당 잔치는 임금이 베푼 것이어서 ‘석연’이라 칭했는데, 이번에는 기로소 자체로 여는 행사여서 ‘사연’이라 구분하였다.(p. 192) 《기해기사첩》 속 다섯 장의 그림 가운데 기로신들이 가장 크게 등장하였기에 인물들의 눈, 코, 입이 모두 또렷하고 얼굴 주름까지 그려 넣어 이전 장면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표현이 세밀하다.(p. 192) 이는 초상화의 전신(傳神, 초상화에서 그려진 사람의 얼과 마음을 느끼도록 그리는 일) 기법이 기록화 속 인물 묘사에도 쓰인 것이다.
숙종대 《기해기사첩》 속 묘사력은 세밀하고 뛰어나다. 기로신들 관복의 흉배도 묘사되어 있고 가슴에 두른 띠의 재질까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는 영조대의 기로소 입소 기록화인 《기사경회첩》과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후자에서는 흉배 자수 등 세밀한 묘사가 생략되어 있다. 이외에도 궁중 연희의 모습이나 시간대의 차이, 전각 활용 방식의 차이, 숙종대 《기해기사첩》에는 등장하지 않던 기녀 등 등장인물의 차이 등을 영조대 《기사경회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비교하며 보면 두 화첩의 감상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저자는 ‘나오는 글’에서 이미지와 사운드, 영상이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미술관, 박물관에 찾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라고 말한다. 바로 눈앞의 작품과 마음으로 교감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각종 AV 연출은 진정한 교감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강력한 견해에 동조하는 이도 있고 아닌 이도 있겠으나 도록을 실은 책의 역할에 대해서는 동조할 이가 더 많을 것으로 사료된다.
오늘날 이런 미술관, 박물관 전시 상황에서 미술품, 특히 그림을 침묵과 응시만으로 만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책이다. 책 속의 그림이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적당한 크기와 인쇄 품질이 뒷받침된다면 어두운 조명과 진열장 유리 반사로 제대로 된 감상이 어려운 전시장보다도 오히려 나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책은 좋은 대체재가 된다. (p. 277)
박물관에 방문해 원본 그림을 육안으로 보면 그만한 감동이 없겠지만 때로는 부분 확대되어 책에 실린 도판이 그림의 한층 깊은 이해를 돕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홍도의 <마상청앵>의 경우 편집자의 의도가 실려 확대된 도판은 그림 속 선비가 그 노랫소리를 감상하는 한 쌍의 꾀꼬리 중 두 번째 꾀꼬리를 찾아 확인하기가 더 수월하다. 또 서화의 경우 오래된 종이의 손상을 막기 위해 전시실의 조도가 낮은 편이니 도판이 충족해주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방대한 정보를 가졌으면서 세밀한 묘사도 빼놓지 않는 궁중기록화의 경우 여러 사람이 함께 감상하는 전시실에서보다 책을 통해 더 차분하고 오래도록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림의 요소요소가 확대된 부분 도판과 저자의 고풍스러운 말투가 독서의 재미를 더하는 한편, 전체 도판의 경우 책의 접히는 면 때문에 매끄러운 감상이 다소 저해되기도 했다. 물론 이를 보강하기 위해 부분 도판들을 더 세심하게 넣은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조선 회화의 여러 시각적 기법-놀이판에서 모두를 앉혀두면 화면이 무거워진다, 다 그리면 화폭이 지루해진다 등등-을 조선의 풍속화, 궁중기록화에 대한 설명과 함께 확인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기에 종종 다시 펼쳐보는 책이 될 것 같다.
본 후기 글에서 인상 깊은 그림을 많이 다루려고 노력했으나 책에 소개된 모든 그림을 언급할 수는 없었다.(당연하게도!) 그러나 김홍도의 <마상청앵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 등 보기만 해도 운치가 있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이 책에 많이 수록되어 있으니 여러분도 책 <조선 미술관>을 펼쳐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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