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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Apr 24. 2023

찬란한 리즈 시절을 만드는 담백한 주문: 카르페 디엠

<페스티벌, 지금>



4월 15일과 16일, 난지 한강공원에서 열린 <페스티벌, 지금>은 축제 전체가 학교라는 컨셉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문 모양의 출입구를 지나온 관객들은 순식간에 학창시절의 어느 때로 돌아가 음악과 축제를 즐기는 학생이 되었다. 나는 15일 토요일 공연을 관람했고, 그날의 출연 가수는 헤이즈, 아이돌 EPEX, 테이, 이석훈, 래퍼 우원재, 그리고 이하이였다.   


페스티벌 진행과 가수들의 무대 중간중간 인터뷰를 담당한 MC 데프콘은 자신을 학생주임이라 소개했고, 공연에 참여한 가수들은 각각의 교과 시간을 맡은 선생님이 되었다. 출연 가수들에게는 본인이 선생님이라면 무슨 과목을 가르칠지에 대한 공통질문이 주어졌다. 누군가는 국어, 누군가는 음악, 누군가는 윤리 선생님이 되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스쿨룩을 차려입은 헤이즈는 자신은 선생님이 아니라 선생님이 잠깐 사라진 시간 동안 다른 친구들과 재밌게 놀기 위해 교실 앞으로 나온 학생이라고 재치 있게 답하기도 했다.  



MC 데프콘이 준비한 또 하나의 공통질문은 가장 빛났던 시절, 이른바 ‘리즈 시절’에 대한 것이었다. ‘당신의 리즈 시절은 언제인가요?’라는 질문에 이 페스티벌은 그것이 당신의 학창시절이었을 것이라는 답을 상정하고 있다. 학창시절은 기본적으로 보호를 받는 어릴 적의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경험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사람들의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교복을 입던 시간에서 자의로 혹은 타의로 걸어 나왔을 수도 있고, 인생에서 화양연화의 순간이 꼭 학생 시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페스티벌, 지금>이 다음과 같은 포부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축제에 온 당신의 지금을 인생의 아름다운 리즈 시절로 만들어 주겠다는 포부를. 실제로 공연을 했던 가수 중 한 명은 MC와의 인터뷰 중에서 이 좋은 주말에 문화예술을 향유하고자 이곳에 시간을 내어 온 여러분들이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분들이고, 그런 여러분들의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아니겠냐는 취지의 말을 했었다. 온종일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예상과 달리 다행히 공연 시작 후로 햇빛이 쨍해져 양산으로 쓰임새가 바뀐 우산의 그늘 아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스티벌, 지금>은 온몸에 열정과 흥분을 두르고 춤추며 즐기는 축제라기보다는, 주말 낮의 이완된 여유가 공존하는 축제였다. 축제 지침에 맞게 관객들은 모두 돗자리를 깔고 앉거나 누워서 동행과 담소를 나누며 공연을 즐겼다. 관객의 나이대는 다양했고, 삼삼오오 같이 온 사람들의 관계도 친구, 연인, 가족, 팬덤 등으로 다양했다.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시기 이후로 열린 공연이었기에 소중한 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미소가 보여 좋았다. 만족감과 여유 어린 미소들이 뒤섞인 낮은 그 자체로 소중한 데가 있었다. 비록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고 그들과 말 한마디 섞을 일이 없을지라도, 그들의 긍정적인 감정의 폭 안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인파가 주는 감정에도 종류가 있다. 물리적인 공간 부족에서 오는 신체적 불쾌감, 혹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의 뜨거움 같은 것. 이렇듯 사람들의 물결이 주는 감정에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기본적으로 압도당하는 느낌이 깔려 있곤 했는데 이날의 경험은 달랐다. 마음만 먹으면 날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음미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의 공기를 의식하며 깊게 들이마실 수 있었다. 이런 이완된 축제의 인파가 주는 감정은 꽤나 나른한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분위기는 햇빛이 가득 녹아든 한 폭의 르누아르 그림 같았다.  



햇빛 가득한 나른함 속에서도 강렬하게 찍은 붓 터치처럼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있었으니 헤이즈의 <헤픈 우연> 첫 소절의 음색이나 테이의 노래들이 그러했다. 노래방에 가면 헤이즈의 노래는 빼먹지 않고 부르는 나는 헤이즈가 <헤픈 우연>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이 페스티벌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라이브에는 역시 라이브만의 감동이 있다. 같이 온 지인은 테이의 공연에서 많은 에너지를 받은 듯했다. 실제로 그는 뛰어난 성량과 가창력, 그리고 재담까지 갖춘 가수였다. 테이의 공연 뒤로 이석훈의 공연이 이어졌는데, 가수 이석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테이는 무대 위에서 날아다닐 기세였다.  

 

여러 가수들의 노래를 감상하다 슬슬 앉은 자세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나도 누울까 고민하다 등을 누이고 함께 와준 지인에게 그의 학창 시절과 리즈 시절에 대해 물었다. 그 역시 나의 학창 시절은 어떠했고 리즈 시절은 언제였는지를 물었다. 근황 얘기, 겹치는 지인 얘기, 노래나 가수에 대한 인상 등의 대화가 소소하게 오갔다. 아마 나 혼자 왔더라면 이 페스티벌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을 테다. 페스티벌 경험이 있는 지인이 든든하기도 했고, 공연이 펼쳐지는 순간순간의 감상을 바로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우리의 리즈 시절이 학창시절이건, 일상에 예술을 더하고 있는 지금이건 간에 ‘리즈 시절’은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학창시절과 학교가 축제의 커다란 컨셉인 만큼 공연과 공연 사이에는 넉넉한 ‘쉬는 시간’이 있었고, 쉬는 시간이 끝날 때면 수업 종까지 쳤다. 그 시간 동안 관객들은 화장실도 다녀올 수 있었고 포토존이나 F&B존 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복고 감성이 두드러진 포토존에서는 연인들이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고 F&B존에서는 음식이나 논알콜 맥주 등을 팔았다. 페스티벌 부지에 교복 대여소도 있고, 드레스 코드 의상인 교복을 입고 오는 관객도 있었던 만큼 도수가 있는 맥주를 팔았다면 페스티벌 전체 감성이 다소 어그러졌을 것 같다. 여러 체험 구역에서 참여자들은 달고나를 만들기도 했고, 오락실 구역의 펌프 기계 위에서 스텝을 밟기도 했다. 풀숲 위에 놓인 펌프에 어색해할 새가 없을 만큼 사람들은 열심이었다.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섞여 이벤트를 즐기고 한가로이 노는 모습에서 중학교 시절의 문화제가 떠오르기도 했다. 

 

오락실 구역에 있는 농구대 기계 앞에서 지인이 다음 쉬는 시간에 내기나 한번 해보자고 운을 띄웠었는데, 이후 이어지는 공연에 몰입하다 그만 둘 다 깜빡하고 말았다. 잊어버리거나 못한 일들이 조금 아쉬웠으나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조금의 아쉬움이 있어야 또 다음 약속이 이어지는 듯하다.  

 

양일권 티켓이었지만 여건상 15일의 페스티벌에만 참여할 수 있었던 아쉬움 등도 다음 기회에 푸는 것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16일 출연자 중에서도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수들이 많았으나 스케줄이 허락해 주지 않았던 탓이다. 또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날 좋은 기회로 듣고 싶은 가수의 노래들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겠거니 하면서 15일의 경험을 기억 속에 꼭꼭 담아두었다. 미래에 지금을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이 또 하나의 리즈 시절일 수도 있으니 그 재료인 추억을 구슬처럼 꿰는 것이 지금 해 둘 일이 아닐까. 이 한 편의 리뷰도 훗날의 구슬 팔찌나 목걸이에서 발견할 하나의 구슬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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