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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Nov 12. 2023

선입견과 과일과 추억

그것은 정말 멀리 있나요.


특별히 선입견이 있는 과일이 있나요?


저는 이 두 단어의 조합을 꺼내 놓고 나니 문득 전래 동화 한 편이 떠오릅니다. 바로 <호랑이와 곶감>이요. 엄마가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에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먹이를 찾아 인가에 내려왔다가 창호지를 덧바른 문밖에서 어슬렁거리던 호랑이는 곶감에 무섬증을 갖게 되었다는 바로 그 이야기요.


아마 아이도 한동안 호랑이처럼 곶감을 무서워했겠죠? 곶감을 직접 먹어보기 전까지 말이에요. 곶감 먹을 기회가 없는 호랑이는 어쩌면, 영영 곶감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겠죠.


보얗게 분이 올라와 사람 군침 돌게 만드는 곶감을, 호랑이는 머릿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렸을까요. 선입견이란 무서워요. 멀쩡한 과일이 누군가의 생각 속에선 무시무시한 발톱과 이빨을 가진 괴수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사설이 길었어요. 사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또 따로 있답니다. 선입견이란 게 겪어 보지도 않고-혹은 못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굳히는 것 외에, 환상과 기대의 수준을 더 높이 띄우며 굳혀가는 성질의 것도 있지 않겠어요?


맞아요, 저한테는 환상의 과일 같은 것이 있었답니다.  



그 환상의 근원은 어릴 적 감상한 한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였어요. 그림자인형극 기법을 사용한 그 영화는 할아버지와 소녀와 소년이 밤이 되면 이야기들로 멋진 영화를 만든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었죠. 동화 같은 여섯 이야기들이 검은 실루엣의 인물과 사물들로 움직이며 펼쳐집니다. 그중에 한 편이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한 소년과 여왕의 이야기였어요.


나무를 집으로 삼던 소년은 여왕님을 존경합니다. 자기가 가진 유일한 것인 이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여왕님께 바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여왕님의 생각을 하며 잠이 들죠. 그 소년의 마음이 통한 것인지 다음날 아침, 나무에는 열매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중 하나가 딱 알맞게 익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겨울이 한국의 겨울처럼 눈 펑펑 내리는 추운 겨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한겨울 하루아침만에 열매가 맺히다니요! 소년은 제 입으로 그것을 가져가려다 멈추죠. 하나뿐인 생과일을 경애하는 여왕님께 바쳐야 하니까요.


여왕님은 소년이 진상한 싱그러운 과일을 맛보곤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한겨울 먹을 수 없는 그 과일을 베어 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시종장이 ‘고작 그 과일 하나에?’라고 놀랄 만큼의 재물을 소년에게 하사합니다. 하루 건너 한 알씩, 소년의 나무에 맺힌 그 열매는 소년이 아침에 눈을 뜨면 맞춤하게 익어 소년의 손에서 여왕의 손으로 건네집니다. 그 이후의 일들과 결말에 대해선 직접 영화를 보셨으면 해요. 미셸 오슬로 감독의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그 절제미와 대조 효과로 인해 눈이 황홀해지는 영화거든요.


신비한 매력이 그득한 그 화면 안에서, 이국적인 장신구로 한껏 치장해 아름다운 옆모습을 한 여왕님. 그렇게 많은 것을 가졌다는 여왕님이 진심으로 맛있다고 감탄하며, 고작 과일 한 알 씩을 들고 오는 소년에게 그리 많은 것을 쥐어준다니. 어린 저로서는 그 과일 맛이 어떠할지 너무나 궁금해지지 않겠어요? 아마 정말 꿈만 같고 환상적인 맛일 거라고, 어린 저는 그 과일의 이름과 함께 잘 모르는 먼 나라의 이미지를 덧붙이며 꿈같은 기대를 키운 게 아니겠어요.  



그 과일의 존재를 인지하고 먹은 건 아마도 대학생이 된 이후일 거예요. 학교 근처 자주 가는 베이커리 B에는 여러 가지 빵들이 있었는데, 제가 종종 집어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무화과 타르트였어요. 맞아요. 그 환상의 과일이 바로 무화과였어요.


자랄 만큼 자랐을 나이이니 이제 과일 하나에서 꿈결 같은 맛이 날 거란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화과는 제게 여전히 낭만과 한 데 묶인 과일이었어요.


무화과의 이름을 풀어쓰면 말 그대로 '꽃이 없는 열매'라고 해요. 꽃이 지고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꽃이 그대로 과육이 되는 식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화과를 먹을 때면 사실 도톰한 꽃을 베어 먹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 사실이 제게는 제법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녹색, 밤색, 짙은 보라색과 검정까지 포함한 과감한 그라데이션의 겉껍질. 그 안에는 붉고 흰 과육이 있습니다. 흰색 과육이 섞여 있기 때문인지 무화과의 붉은색은 토마토나 체리의 붉은색과는 달리 더 옅고 은근합니다.


베이커리 B에서 만난 무화과는 건조된 무화과로, 씹으면 씨가 톡톡 터지는 식감이 재미있었지만 아쉽게도 저 영화 속 여왕님이 베어 문 것 같은 생 무화과는 아니었어요. 혀끝에는 단맛이 돌았지만 이것이 무화과만의 단맛인지 곱게 발린 시럽의 단맛인지를 구분하기도 힘들었죠.


생 무화과를 맛본 것은 그보다 좀 더 지나서입니다. 첫맛의 소감은 외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조금 허무한가요? 하지만 확실한 건, 묘한 맛은 먹으면 먹을수록 그 묘함이 세밀하고 친근해진다는 거예요.


이 글을 쓰며 무화과의 오묘한 단맛을 표현할 단어로 무엇이 적절할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시간으로 진득해진 곶감의 짙은 단맛. 귤과 오렌지와 각종 시트러스 계열의 새콤달콤함. 사과의 싱그러운 단맛과 청포도의 산뜻한 단맛.


과일에서 사전으로 옮겨 가 각종 달콤한 단어들의 정확한 뜻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달콤하다. 달큼하다. 덜큼하다.


달달하다. 달짝지근하다.


감미롭다.


단순히 달콤하다기엔 그 단맛이 묘하며, 달큼하다기에도 무화과의 단맛은 연합니다. 또 감칠맛을 느끼기엔 혀를 감도는 그 맛이 금세 사라져 버립니다. 덜큼하다기엔 무화과의 끝맛과 톡톡 터지는 씨앗의 식감에 또 묘하게 감각을 깨우는 알싸한 산뜻함이 있지 않나요? 달달함은 소위 달다구리로 불리는 디저트 류에 쓰일 것 같습니다. 달짝지근하다는 말은 그 어감이 왠지 무화과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군요. 감미로움이 무화과를 대표하기엔 역시 또, 그 밀도가 낮습니다.


혀에 남는 단맛이 무겁거나 찐득거리지 않으면서, 옅은 감미로움이 코 끝과 입 안에서 잠시 머물렀다 떠나지만 그 달콤한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으니 어쩌면 ‘달금하다’는 말이 이 과일과 어울리지 않을까요. ‘달금하다’는 말 또한 꽤 달다는 뜻풀이를 달고 있지만, 그래도 비슷한 뜻의 ‘달큼하다’ 보다는 그 맛이 더 옅지 않을까 다소 제멋대로 짐작해 봅니다. 단맛을 지칭하는 단어들 각각의 단맛을 가늠해 보다 마침내 골라낸 말이 저는 제법 만족스럽습니다.


달금하다는 말에는 무화과에서 느껴지는 단맛 외의 다른 묘한 맛들도 넣어볼 수 있을만한 여백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무화과의 무른 과육과도 조화롭게, 달큼보다 여린 달금의 느낌이 또 마음에 듭니다. 

 

 

무화과의 묘함을 말로 글로 풀어내 볼 만큼 친숙해지면 이제 곧 무화과를 가을이라는 계절 너머로 떠나보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옵니다. 다행히 이것은 그리 섭섭한 일이 아닙니다. 이 자연스러운 헤어짐이 있기에 또 내년의 무화과를 아스라한 상태에서 새롭게 만나볼 수 있으니까요.


섬세한 향미의 무화과와 즐겁게 내외하는 비결은 역시, 그 계절에만, 무화과가 나는 가을에만 무화과를 먹는 것입니다.


카페의 가을 디저트들에 무화과가 올라오기 시작하고 인스타 피드에 무화과 디저트 맛집 리스트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잼을 졸이는 것처럼 무화과 먹고 싶은 마음을 졸일 것.


디저트 위에 예쁜 모양으로 잘려 올라온 것이건, 한 팩에 몇 개씩 든 무화과를 기쁘게 사 와서 가족들과 함께 뿌듯하게 먹는 것이건. 혹은 모처럼 잘 안 사던 크림치즈를 사서 차갑게 보관해 둔 무화과에 함께 곁들여 먹는 것이건.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는 이 기간 동안 무화과를 여럿 음미해 둡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무화과는 한 알은 온전히 손에 들고 그 둥근 끝을 베어 먹을 것. 이때는 과육에 상온의 미지근함이 배어 있든 냉장고의 찬 기운이 배어 있든 상관이 없답니다. 무슨 온도에서 먹건 그 단맛이 자기 매력을 은근히도 확실히 전달하니까요.


이쯤 되면 무화과 하나에 온갖 의미 부여를 하며 유난을 떠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무화과의 향도 식감도 그 특유의 달금함도 마침 제 취향에 딱 맞아떨어져 그런 것이지만, 어쩌면 이 뒤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화과는 귤이나 사과, 배 혹은 감에 비하면 여전히 덜 대중적인 과일이고 모든 계절에 매대에 나와 있는 과일도 아닙니다만 찾으려면 찾아볼 수 있는, 그렇게 희소하기만 한 과일은 분명 아닙니다. 어쩌면 저는 이 과일을 즐길 수 있는 한정적인 시간에 기대어 이것이 신비롭고 낭만적인 과일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제가 가을과 겨울의 경계를 나는 방법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일지도 모르죠. 마치 하나의 유희처럼요.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엄마의 어릴 적 집 마당에 무화과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엄마에게도 희미해져 가는 기억이었던 모양으로, 막상 어린 저와 함께 그 영화를 볼 때는 분명하지 않았던 과거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엄마의 유년기 한 군데의 풍경은 한두 해 전에야 제게 전달되었습니다. 기억의 가리어짐은 어떤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서마저도 흐릿하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깨지지 않아도 좋을 선입견이라며 무화과에 대한 애호심을 유달스레 간직했지만 이것이 내게 생각보다 가까운 과일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먼 나라 여왕님의 희귀한 과일이기만 한 것이 아닌, 엄마의 추억이기도 했던 무화과.


제가 무화과에 환상을 키우기 시작한 나이와 집 앞마당 나무에서 무화과를 따던 엄마의 나이는, 알고 보니 엇비슷했습니다. 제가 환상을 키우던 것 중에 사실은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던 것은 또 얼마나 있을까요?


엄마와 나는 많은 시간 같이 있지만 서로 당연하게 여기다 모르고 살아온 것이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지금 집에는 제가 좋아해서 엄마가 사 온 무화과가 여러 알 있어요. 글을 쓰는 동안 물기를 말리고 있는 무화과 중 두 알을 집어 색과 향을 유심히 살피고 한 입씩 야금야금 먹었습니다. 더 관찰하고 먹으면 마치 그것이 글의 양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괜스레 저녁을 드시는 엄마 옆에서 무화과와 관련된 당신의 옛날을 더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무화과와 선입견으로 시작해 결국은 가수 이랑의 한 노래 가사들이 유독 떠오르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말하듯 노래하듯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길고 긴 제목의 노래. 그 곡에서 이랑이 가족에 대해 말하는 모든 부분들이 유달리 생각이 납니다.


노래 속 화자의 가족과 내 가족은 그 구성원도 다르지만. 그래도 엄마와 나는 몇 번의 대화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엄마와 나눠보고 싶은 대화들, 엄마가 나와 나눠보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 대화들은 언제를 기약할 수 있을까요.


명확한 답도 부러 부딪힐 용기도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저 엄마가 나를 생각해서 사 오신 무화과를 남김없이 먹는 것이 작은 내 몫인 것 같습니다.


완연한 겨울이 도달하기 전에, 내 손에 있는 달금한 무화과를 달금바시 먹어봅니다.  



* 달금바시: '매우 맛있게'라는 뜻의 경북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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