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짐머 영화음악 콘서트
지난 주말, <한스 짐머 영화음악 콘서트>를 보기 위해 롯데콘서트홀을 방문했다. 바깥 날씨는 11월이라 하기에 여전히 따뜻했지만 어김없이 연말을 맞은 백화점과 쇼핑몰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했다. 붉은 포인세티아 장식이 출현하는 연말은 영화음악 콘서트를 감상하기에 맞춤한 시기였다.
첫 곡은 <인터스텔라>의 ‘First Step’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는 사람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이 곡은 분위기 상으로도 콘서트 첫 곡에 걸맞았고 제목이 특히 콘서트를 ‘여는’ 효과를 냈다. 한스 짐머의 영화음악 세계로의 첫 발걸음을 뗀 뒤에는 <다크 나이트>의 메인 테마곡이 연주되었다. 히스 레저의 조커로 유명한 이 영화는 배트맨이 활약하는 고담 시티를 상대로 조커가 악의적으로 조성한, 서로의 목숨이 걸린 딜레마 상황과 그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대처라는 전개로도 유명하다. <다크 나이트>의 메인 테마곡을 들으며 이 영화를 처음 감상했을 당시 엔딩으로 치달아가는 상황에서 느꼈던 긴장감을 오랜만에 곱씹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탑건: 매버릭>의 메인 테마곡과 <이집트 왕자>의 ‘이집트 왕자 메들리’가 이어 연주되었다. 성경의 출애굽기와 모세의 삶을 다루는 애니메이션 영화인 <이집트 왕자>는 1998년도 개봉작이고, <탑건: 매버릭>은 2022년도 개봉작이다. 두 영화는 개봉 시기로도, 또 영화 안에서 다루는 시대 상으로도 커다란 시차가 있지만 이 영화들의 음악을 연이어 연주한 데에는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짠 제작진의 의도가 분명히 있어 보였다. 군인 파일럿들을 소재로 한 <탑건: 매버릭> 메인 테마곡에는 붕 떠오르는 감각이 들어 있었다. 주인공인 피트 미첼, 즉 매버릭의 자유로운 반골 기질이 테마곡에서 곧잘 느껴지다가도 그가 몸담은 집단이 군대임을 잊지 않게, 자유로운 나선과 엄격한 규율의 직선적인 이미지가 비행기의 상승과 하강처럼 교차하다 융합했다. <이집트 왕자>의 ‘이집트 왕자 메들리’에서는 모세가 왕자로 자라났으나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탈출해야 했던 옛 이집트의 사막이 연상되었고 음과 음 사이로 중동 지역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선율이 들렸다. 두 영화 음악은 영화의 주된 소재가 영화음악에 어떻게 반영되고 구현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다빈치 코드>의 메인 테마곡에서는 첫 소절부터 추리 장르 특유의 미스터리함이 물씬 느껴졌다. 구약 출애굽기의 <이집트 왕자>에서 신약을 모티프로 상상력을 펼쳐 낸 <다빈치 코드>로 콘서트의 흐름이 이어지는 점 또한 흥미로웠다. 지역, 시대, 그리고 종교문화적으로도 현대로 흘러 흘러 오는 느낌이었다.
1부와 2부 모두 각 부의 마지막 곡을 백미로 삼아 들려주었는데, 1부의 마지막은 <글래디에이터>의 ‘The Battle’이 장식했다. 옛 로마를 배경으로 한 <글래디에이터>는 억울하게 멸문 당한 후 자신은 노예 검투사가 된 주인공이 원수의 앞에서 자기의 긴 본명을 말하는 명장면으로 유명하다. 곡을 듣자마자 흙먼지와 다부진 어깨, 단단한 근육 그리고 갑옷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곱씹어 보아도 이는 영화에 대해 내가 가진 선지식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인식 이전에 이미 이미지가 날 찾아온 느낌이었다. 이는 순수하게 한스 짐머 영화음악이 지닌 주제 구현 능력에 원인이 있어 보인다. 한 마디로 한스 짐머 옹이 음악을 너무 잘 만들었다는 말이다.
곡의 스케일에 감탄하고 있다가, 곡의 말미에 가서는 주인공에 대한 연민이 들었다. 곡명은 ‘The Battle’이지만 끝에는 슬픈 평온함이 찾아온다. 아마 <글래디에이터> 엔딩을 본 적 없는 감상자도 이 음악을 듣다 보면 느꼈을 테다. 주인공이 결국 죽음으로 평온을 찾았다는 것을. 이 콘서트를 감상할 당시 나는 가족들과 <글래디에이터 2>를 보기로 예매해 둔 상태였기에 음악을 통해 1편을 복습하는 기분도 들었다.
2부에서는 감상하지 않은 영화가 더 많았다. 2부를 여는 곡은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Is She With You?’였는데, 서로 다른 대의를 지지하는 두 영웅의 커다란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곡이었다. 또, 영화 제목에 들어 있는 ‘시작’이라는 단어로 1부의 첫 곡인 ‘First Step’에 담긴 시작의 의미와 구조적으로 대구를 이룬 점에서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음악은 영화의 시각성과 상보적인 음악이다. <한스 짐머 영화음악 콘서트>에서는 영화음악의 이러한 특성을 조명을 통해 상기시켰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연주가 각각 치고 나올 때 다른 색의 조명을 각각의 연주자들에 비추어 강조하는 조명 활용 외에도, 개별 영화의 상징적인 사물이나 색감을 단순하지만 재치 있게 아이콘화하여 무대에 조명을 비추는 활용 방식 또한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꿈의 세계에서 타인의 아이디어를 훔쳐온다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 <인셉션>의 음악을 연주할 때, 끝없이 도는 팽이 토템을 단순화한 이미지가 조명을 통해 무대 바닥에 쏘아졌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테마곡이 연주될 때는 원형 이미지의 조명을 활용해 007 특유의 오프닝 시퀀스를 간단하게 재현했다. 동그란 총구가 돌아가는 사이로 제임스 본드가 보이는 그 유명한 시퀀스 말이다.
<진주만>의 ‘Tennessee’, <분노의 역류> ‘Fighting 17th’는 둘 다 아직 본 적 없는 영화 속에 삽입된 곡이었지만 두 곡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소중히 하는 아름다운 것들, 지키고 싶어 하는 일상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Tennessee’는 곡이 참 아름다워서 주인공의 고향 내지는 지키고픈 삶의 터전과 전쟁이라는 참상 간의 대조를 역으로 관객들에게 예고하는 듯했다.
소방관 이야기인 <분노의 역류> 부분에서는 불을 연상시키는 붉은 조명이 무대 위를 메웠었는데, 2부를 닫는 곡인 <캐리비안의 해적> 메들리에는 대양의 물결치는 수면 같은 푸른 조명이 앞서의 붉은색을 마치 불을 끄듯 덮었다. 이 메들리가 이번 콘서트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이 아닐까 한다. 다소 세속적인 감상이지만 <캐리비안의 해적> 메들리를 듣는 순간 ‘이 곡은 돈을 부르는 곡이다…!’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이 곡은 발표될 당시 영화의 소재를 음악에 구현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영화 전체의 정조를 만들어 내는데 한 획을 그은 영화음악이 아니었을까?(마치 <겨울왕국>의 ‘Let It Go’처럼…) 이 곡을 완성하고 감독에게 들려줄 때, 한스 짐머 사단이 얼마나 뿌듯하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했을지 저절로 상상이 되는 곡이었고, 만약 그랬다면 그 자부심이 과하지 않고 당연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스 짐머 영화음악 콘서트>를 감상하며 오래전에 본 영화는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고, 아직 본 적 없는 영화에 대해서는 영화의 정서를 생생하게 미리 만나 볼 수 있었다. 특히 <진주만> ‘Tennessee’는 앞으로 글을 쓰면서 듣게 될 것 같다. 보통은 영화를 관람 후 영화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는데 이번에는 역순의 경험을 하게 되어 새롭고, 연말 영화음악 콘서트 특유의 포근함과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도 좋은 영화, 좋은 음악을 많이 만나는 한 해 한 해가 되기를. 이렇게 적으며 음악을 빼 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영화들, <위키드>와 <모아나2>의 개봉일을 검색해 보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