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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Nov 13. 2024

거품 우주 속 인간들에게 SF 연극이 전하는 말

과학의 언어를 통해, 현존을 수용하라는 위안을.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평생 동안 욕망을 실현해나가며 분투하지만, 결국 그 욕망의 정거장에서 미끄러져 소진되고, 빈 껍데기(기표)로 남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 희망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연극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을 보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소개글 때문이었다. 원하는 바를 향해 달려나가다 미끄러져 상처 입고 소진된 사람을 SF 연극은 어떻게 해석하고 보여줄까. 그리고 기표로 남는 자신을 발견한 주인공에게 연극은 과학적 상상력 안에서 어떤 메시지를 남길까. 그것이 궁금했다. 


고아 같은 삶을 살던 주인공 차연. 그녀는 생전의 아인슈타인처럼 ‘단 한 줄의 방정식으로 우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물리학도가 되고자 분투한다. 그러나 무대 반쪽에서는 기억을 잃고 경찰서에 쓰러져 누워 자는 노파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 설명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렇듯 물리학도로서 자신을 입증하려는 차연의 삶과 기억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파의 상황은 교차되고 점점 얽힌다. 그들은 ‘평행우주 속의 또 다른 나’일까 아니면 ‘꿈속의 나 자신’일까.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평행우주 속 또 다른 ‘나’와의 만남/긴밀한 얽힘 관계(양자역학 용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인간의 존재에게 있어서 욕망의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존의 수용임’을 그리고 있다. 


극의 시작에서 주인공 차연은 같은 동호회 회원들인 한 커플에게 열심히 양자역학을 설명한다. 차연의 생활은 학교에서의 연구와 야광 버섯 서식지 관찰 동호회를 위한 산행과 관찰, 동호회 회원들과의 약간의 사교 활동이 전부다. 


무대 뒤편에는 나무판이 세워져 있는데 판 중앙의 검은색 원 양 옆에 문을 비스듬히 그려 놓은 듯한 모양의 검은색 직사각형이 있다. 이 검은색 문은 각기 다른 우주를 암시한다. 차연과 노파를 비롯하여 몇 명의 등장 인물들은 하나의 무대를 공유하며 움직이지만 사실 그들은 각기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들이다. 차연이 발화할 때면 차연의 세상에 속한 문의 조명이, 노파가 발화할 때면 노파의 세상에 속한 다른 쪽 문의 조명이 켜졌다. 


차연의 맞은편에 누워 있던 노파는 치매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경찰이 노파의 이름과 집 주소 등을 묻지만 노파의 기억은 잠시 후 자신이 ‘주변부’라고 분류하는 것들 뿐이다. 이를테면 그가 어느 대학을 다녔다던가, 젊을 적 직업이 무엇이었다던가, 남편은 누구였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자신이 한국대 물리학과 교수였다고 설명한 노파의 말은 경찰서를 통한 신원 조회에서 맞지 않는 정보로 나온다. 


차연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지만 학계의 부정적인 면에 실망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분노하고 있다. 차연을 마음에 둔 선배는 차연을 걱정하지만, 널 아낀다고 말하면서 정작 사귀자고는 하지 않는 선배의 모습마저 차연에게는 답답하고 마음의 짐이 될 뿐이다. 


노파는 자신의 남편을 기억해낸다. “날 아주 아끼는 사람이었어요.”


야광 버섯 동호회의 한 회원으로부터 미묘한 끌림을 느낀 차연은 대학원 선배에게 내지르듯이 말한다. “나랑 살래요?” 마치 그 남자에게 느낀 끌림이 더 커지기 전에, 정 든 동반자 같은 선배가 자신을 잡아주길 바라는 듯이. 


노파의 꿈 속에서 머리가 희끗해진 노인이 된 선배는 죽음을 맞던 당시에 노파의 이름을 떠올렸노라고 말한다. “당신이 내게 그런 사람이야.”


경찰서 사람들은 노파가 말한 ‘남편’이 사실은 다른 여성과 결혼했고 부부가 한 날 사고사했음을 알게 된다. 


서로의 세상을 오가며 비춰지는 이 상황들을 서로 대응하는 항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리학도의 길을 기쁘게 걷고 있던 차연/ 자신이 물리학 교수였다고 말하는 노파. 

학계에 실망하고 분노한 차연 / 물리학 교수가 아니었음이 밝혀지는 노파.

차연을 아끼는 선배 / 내 남편은 나를 아주 아끼는 사람이었노라 읊조리는 노파. 

노파의 꿈에 나타나 깊은 사랑을 고백하는, 이제는 노인이 된 선배 
/ 노파의 남편에 대한 기억 역시 틀렸음을 알게 되는 경찰서 사람들.


연극은 이렇게 진행됐다. 노파는 차연의 쇠락한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가, 경찰이나 경찰서 컴퓨터에 몰래 접속한 노숙자가 노파가 애써 기억해 낸 정보의 진위를 알게 되면, 다시 차연의 세상에서 노파의 말과 반대되는 결과의 전말을 보여주듯이 장면과 장면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시간선이 조금씩 어긋난 채 대응하는 것처럼 연출했다. 마치 차연과 노파, 두 인물이 하나의 짝은 맞는데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장면들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밀려서 끼운 것처럼 한 박자씩 어긋나는 느낌으로 말이다. 


문제는 한 발씩 먼저, 혹은 한 발씩 나중에 서로의 인과를 보여주는 것 마냥 연출된 차연과 노파의 세상이 있는 이 연극이 시간여행이 아니라 평행우주를 핵심 원리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 인생의 인과를 엇박으로 진술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시간선의 장면들은 사실 다른 우주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앨런(Alan Guth, 1947~)은 빅뱅이 일어난 직후, 아주 짧은 순간 동안에 최초의 우주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고 말합니다. 거품처럼 말입니다. 

(…) 우리의 우주가 정말 무한히 크다면 한 가지 이상한 논리가 성립됩니다. 

무한한 크기의 우주에서 원자와 분자의 한정적인 배열은 어쩔 수 없이 반복되면서 우리와 비슷한 이들을 만들어 내고 결국에는 똑같은 존재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우의 수가 바닥나면 똑같은 가능성이 반복될 것입니다. 우주가 무한히 넓다면 어딘가에는 지구와 똑같이 원자가 배열되어 만들어진 행성이 있고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복제되어 있을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대에 있는 두 개의 문, 두 명의 주요 인물(차연과 노파) 때문에 극의 초반에 관객들은 이 연극에 드러난 세상이란 자연스레 두 개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극의 중반부를 넘어서면 이 또한 두 개의 문이라는 시각적 요소를 이용한 눈속임이었을 가능성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실제로 ‘경찰서에 있는 노파’가 나오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페이드 아웃과 페이드 인 사이에 경찰의 태도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하거나 노파의 집을 찾는 일의 세부사항 등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젊은 차연의 시간선으로 착각하고 있던 것이 젊은 차연이 살고 있는, 노파가 사는 것과는 별개의 세상임을 알게 되었지만 극은 그 사실을 한 번 더 비튼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던 노파가 눈에 총기를 찾고 분명하게 외친다. “주변부가 아닌 자길 기억해야 해요. 뭔가 계속 기억하려는 나 자신, 주체!” 노파의 외침 뒤로 모든 인물, 서로 다른 세상에서 발화되었던 말과 사건들은 더 뒤섞인다. 우주1에서 선배가 차연에게 했던 말이 선배가 동호회 남자 회원에게 건네는 말로 변하기도 하고 어떤 인물의 말이 다른 인물의 입에서 나오기도 한다. ‘나’의 의식, 내가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그 감각 자체 외에 모든 것-한때의 직업, 내가 선택한 배우자, 내가 만났던 사람들, 내가 겪었던 여러 사건들-이 주변부라는 듯이 지금까지 극에서 나온 모든 것들이 이 장면에서 혼합되고 교차되어 다른 가능성들로 발현된다. 


평행우주 간 가능성의 회오리 같았던 장면을 지나면 다시 젊은 차연이 있는세상이 나온다. ‘서 회장님’을 찾는 남자 회원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관객이 극의 처음에 본 세상과 동일한 세상 같지만 이 또한 속 시원하게 확신할 수는 없다. 극 내내 간간히 울려퍼지던, 남자 회원이 ‘서 회장님’을 찾던 목소리는 드디어 ‘서 회장님’ 본인과 닿는다. 야광 버섯 동호회의 회장이자 야광 버섯 서식지를 계속해서 증식시킨 서 회장은 치매가 생긴 후로도 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계속해서 모임에 나오는 노파다. 경찰서에 누워 있던 그 노파와 똑같이 생긴, 이 평행우주의 또 하나의 가능성. 이쯤 되면 한 가지 질문이 나온다. 차연이라는 사람은 젊건 늙건 한 세상에 한 명만 있는 거 아니었어요? 모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본 모든 것이 그저 노파의 호접몽이었을지도요. 사실 과학계에서 평행우주를 현재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평행우주에 살고 있는 다른 모습의 자기 자신을 만나 확인할 일은 (아마도) 없듯이, 인식하고 기억하려는 주체인 ‘나’가 모르면 저 너머 세상의 일들은 없는 일이듯이. 


관객의 성향에 따라 다소 허탈함에 빠지기 전에 연극은 노파 서 회장이 페이드 아웃된 다음 막간에 또 다른 평행우주의 차연을 잠시 보여준다. 명확히 언어화된 정보는 없지만, 물리학 교수가 된 것 같은 차연이 밝은 모습으로 일어서고, 퇴장한다. 극은 그렇게 끝이 난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양자역학과 평행우주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읽으며 연극을 다시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양자역학의 주요 개념은 빛이 ‘파동인 동시에 입자일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 빛이 파동인 동시에 입자일 수 있는 것처럼  물질을 이루는 입자들이 동시에 파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한 번에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우주를 이루는 모든 물질은 입자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파동은 고정된 위치를 갖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입자가 파동이기도 하다면 한 입자는 동시에 두 장소에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인류가 살고 있는 세상이 수많은 평행우주 중의 하나라면, 수많은 경우의 수가 수많은 우주의 숫자만큼 구현되어 수많은 차연이나 노파가 살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모든 차연은 파동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치매에 걸린 노파가 된 차연은, 세상을 또렷하게 보게 해주었던 인지 기능이 허물어지며 역으로 다른 것을 인지하게 됐을 수 있다. 자신의 입자, 파동이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으며 겪는 일들을 하나의 꿈처럼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인류는 우주 만큼이나 자신의 뇌를 모르는 데다, 이 극은 SF연극이기에 극을 다시 읽으며 상상력을 더해 보았다. 


무한히 커다란 우주에서 입자의 모든 경우의 수가 다 구현된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함일까, 사실은 목적이 없는데 그저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럼 인간은 왜 사는가-하는 고민은 또 다른 글로 맺히기를 희구해 보며 잠시 뒤로 밀어두자.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를 남긴다. 어떤 후회는 그저 아쉬울 뿐이지만, 어떤 선택에 대한 후회는 지나치게 아프다. 인생을 의미하는 시계가 있다면 그 시계를 돌리고 싶을 만큼. 후회로 인해 두고 두고 다치는 마음이 몇 년을 응어리 진 채 있다가, 어떤 날에 내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 지우고 싶지 않은 만족의 순간을 맞게 되면 그 짙은 후회가 백사장에 쓴 글자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섣불리 과거에 손을 댔다가 지금의 기쁨이나 인연을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 후회스러움이 설령 아주 사라지지 않더라도 저 멀리 대양으로 떠내려가 잊을 수 있을 만큼 존재감이 작아지기는 한다. 


여기에 우리가 사는 우주가 단 하나가 아니고, 평행우주 중의 하나여서 내 삶이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의 현현 중 하나라는 생각을 더하면 기묘한 기분과 함께 맥이 탁 풀린다. 내가 후회하며 지나친 선택지를 들고 그 길로 살아가는 내가 우주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 보지 않은 방향으로 노를 젓고 있을 또 다른 나의 삶이 좋을지 나쁠지는 영영 모르겠지만, 내 삶이 단 하나의 결말이고 유일한 결론이 아니라면 조금 더 내려놓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주도 거품이라는데 별의 먼지에서 태어난 내가 숨막히게 살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인생을 우주 단위로 연결 지어 생각하다 보면 한낱 인간으로서는 결국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 우주나 철학에 박식한 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현재의 나는 그렇다. 모든 것은 호접몽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엄연한 현실일 수도 있다. ‘나’ 외의 ‘나’가 현존하는 세상에서 하는 경험들 또한 나의 일부로 칠 수 있을까. 내가 하지 않은 일들이 어딘가에서는 이뤄졌을 수도 있으니 이곳의 나는 마음 편히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여러 가능성을 머리 아프게 고민해 본다. 


결국 또 다시, ‘무엇을 바라보는가’와 ‘무엇을 믿는가’가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모르는 것도 믿을 수 있는 인간이니까. 


택하지 않아 생기는 아쉬움이나 아픔조차 이 세상 ‘나’의 가능성으로 평생 무겁지만은 않게 만들어 두고, 현존에 집중하는 것 또한 개개인의 선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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