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더위를 식혀 주는 단비가 내린다. 비를 보며 잊고 지낸 옛 기억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나보다 10살 많은 남자를 27세에 만나, 사업하면서 승승장구하며 잘 살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망해버렸다. 남편은 외국에 가서 다시 재기하고 싶어 했다.기죽이고 싶지 않았다. 지인의 돈을 힘들게 빌려 그에게 보냈다.
타국에서 고생할 남편을 생각하며 아들 셋과 씩씩하게 버티며 살았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남편이 불쑥 나타났다. 바이어를 만나기 위해 왔고 자금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당시 나는 아이들과 사는 집의 집세도 제대로 못 내서 주인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나는 여기저기 부탁하면서 남편의 사업자금을 구하러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그는 일이 있다고 2박 3일 다녀온다고 지인 차를 빌려 떠났다.나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돌아온 남편이 피곤하다고 잠든 사이 남편의 시티폰을 몰래 가지고 나왔다.
음성 메시지가 몇 통 와있었다. 비밀번호를 눌렀다. 몇 번을 실패하 고나서야 드디어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자기야, 조금 전에 헤어졌는데 또 보고 싶어 차에 수첩을 놔두고 왔는데 누가 보기 전에 챙겨줘요"
익숙한 아가씨의 목소리였다.
내 귀를 의심했고 다시 들었다. 내가 아는 그 애가 맞았다.살이 떨리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총 맞으면 이렇게 아플까?'
애써 마음을 진정하고 자는 남편을 깨웠다.
피곤하다고 짜증을 낸다. 스피커폰으로 음성을 들려줬다. 시퍼렇게 질려 벌떡 일어난다. 빼도 박도 못하는 물증 앞에 넋 놓고 나를 본다.그전까지 살면서 한 번도 그에게 반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 애한테 전화해!"라고 하니까, 일단 자기 말을들어 보라고 버벅거린다. 다시 한번 단호하게 "전화해!!"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한다. 반가운 전화라서 그런지 "자기야~" 하는 콧소리를 낸다.
전화기를 빼앗아 "여보세요!" 하니까 내 목소리에 놀라 헉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지금 같이 집 앞으로 갈 테니까 나와, 하고전화를 끊었다.남편을 향해 "운전해!"라고 하고 차에 먼저 탔다. 가는 내내 내가 그 애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가면서 계속 의문이 생겼다. 그 아가씨는 남편이 외국 가기 얼마 전 관광지에서 차를 태워줘서 알게 된 사인데 어떻게 된걸까. 생각에 잠긴 사이 차는 그 애의 집 앞에 도착했다. 바닷가 부근이라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연신 미안하다며 운다.난 흥분도 안한채 사연을 물었다.그 애의 말로는 우리를 알게 된 후 남편과 따로 계속 만났다고 한다.영문과를 나와 영어를 잘하고 외국 가서 살아 보고 싶다고 했단다.남편이 외국 가서 사업하겠다고 내게 말한 게 그 때문인 것 같이 들렸다.
나만 모른 채 둘이 떠났고 외국에서 사업의 진전이 없는 채로 크게 싸워 그 애가 한국으로 왔단다. 남편은 뒤따라 귀국해 그 애를 설득하려고 강원도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단다.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그 애에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니 그를 사랑한다고 하며 울기만 한다.
희한한 건 먹구름이 낀 듯답답했던 내시야가 갑자기 밝아지듯 명쾌한 답이 나왔다.
"그러면 둘이 살아."
아이 셋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둘이서 외국을 가든 한국에 살든 알아서 해라고 했다.
그 애는 울부짖어며 결혼은 안 할 거라고 가버린다.남편은 그 애가 어찌 될까 봐 바로 뒤따라 간다.
11월의 바다는 차갑고 을씨년스럽다.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걷는데 그 애를 태운 남편의 차가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자정이 다돼가는 바닷가 부근엔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아이 셋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사업자금은 늘 내가 융통했고 무리하게 일을 벌이는 탓에 난 진짜 지쳐있었다. 차라리 애들 셋 하고만 살면 예측 가능한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더더욱 미련이 없었든 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넌 내가 버린다,라는 생각을 하고
38세에 이혼했고, 난 지금 아들 셋과 잘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아픔으로 인해 인생을 더 맛깔나게 살 수 있었다.60세 이후의 내 삶은 아픔에 꺾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온 내 이야기를 브런치와 함께 녹여내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드는 이 순간도 비가 내린다. 울고 싶을 때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게 하는 비라서 비 내리는 날이면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