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빛노을 Aug 19. 2021

이혼하길 정말 잘했다

이혼한 후 나답게 살 수 있었다.



미친 듯이 좋아서 만났어도 살다 보면 저마다의 이유로 힘들어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이혼을 하면 마치 인생을 실패한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라 참고 사는 사람이 많았다.


 

난 이혼을 결심하고  잠시 타 지역 지인 집으로 주소를 변경했다. 내가 사는 지역 법원에 가면 혹여 아는 사람 만날까 봐 두려웠다. 또한 친정 엄마 아시면 충격받을 받으실까 봐 모르게 하고 싶었다. 이혼한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 하고 사는 건 더 이상 못 견딜 것 같았다.


옛날에는 이혼할 때 숙려기간이 없었다. 합의이혼을 했다. 판사 앞에 앉았는데 내게 묻는다. 애들은 누가 키우냐고. 내가 키운다고 답했다. 육비는 받느냐고 묻는다. 안 받기로 했다고 하니까 그러면 친권은 나한테 준다고 했다. 순간 그게 뭔지 몰 판사에게 물었다.

"친권이 뭡니까?"

판사 말이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안 하니까 당연히 엄마가 친권을 가지고 애를 키워야 한다고 했다. 가슴 뭉클했다.


그는 가진 게 하나도 없다.  가진 것도 없고 빚만 있었다. 양육비를 조금이라도 보내라고 하니까,  한동안 형편이 안될 것 같다고 한다.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서 알았다고 했다.


법원을 나오면서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했다. 전화번호도 바꾸고 이사도 갈 거다.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라.

라고 말했다. 내가 워낙 강경하게 이혼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그는 속절없이 받아 들려야만 했다.


만약, 바람피운 것만 문제였다면 난 속은 쓰려도 참고 살았었거다. 내가 제일 못 견디는 건 애들한테 아버지로서의 책임감도 없고 속상한 일만 있으면 큰애를 때렸다 것이다. 신기한 건 둘째 셋째는 때리지 않았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상극이 있다는 말이 실감 났다.  한 가지는 능력 밖의 일을 벌이고 마무리는 내가 늘 한다는 사실이다. 애들이 아빠를 좋아하고 계속 찾았다면 나는 섣불리 이혼하지 않았을 거다.


이혼을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한 동안 애들한테는 아빠는 외국 갔다고 했다. 이혼 후의 생활은 별반 다른 게 없었다. 다만, 지인들을 만났을 때 우리 애들 또래의 친구들이 '아빠'하고 부르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학원도 보내지 못했고, 잘 먹이지도 못했다. 단무지와 일미채가 반찬의 전부다. 가끔은 두 마리 치킨을 시켜서 우리들끼리의 파티를 열었다.


돈이 없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아빠가 없는 것도 창피한 게 아니다. 애들 앞에힘들어하고 좌절하는 모습 보이는 게 진짜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풍요로움은 줄 수 없었지만, 편안함을 주고 싶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쉬게 해주고 싶었고, 남과 비교하지 않았다.


내 삶은 내가 주인공이다.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다.

그게 삶이다. 언젠가는 나도 어렵지 않을 순간들이 있을 거라고 믿 당당하게 살아왔다.


이런 순간들도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큰애한테는 늘 미안하다. 중학교 때부터 알바를 해서 집에 보탰다. 큰애 10살 때 이혼을 했다. 뭔가 알 나이에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제일 미안해하는 부분이다.


이혼이 결단코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난 내가 이혼하고 아이들과 사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내가 살면서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가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다.

역경을 이겨내고 부부가 한평생 살아가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들이 삶의 진정한 승리자들이다.

작가의 이전글 비가 오면 옛 기억이 떠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