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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노을 Aug 19. 2021

이혼하길 정말 잘했다

이혼한 후 나답게 살 수 있었다.



미친 듯이 좋아서 만났어도 살다 보면 저마다의 이유로 힘들어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이혼을 하면 마치 인생을 실패한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라 참고 사는 사람이 많았다.


 

난 이혼을 결심하고  잠시 타 지역 지인 집으로 주소를 변경했다. 내가 사는 지역 법원에 가면 혹여 아는 사람 만날까 봐 두려웠다. 또한 친정 엄마 아시면 충격받을 받으실까 봐 모르게 하고 싶었다. 이혼한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 하고 사는 건 더 이상 못 견딜 것 같았다.


옛날에는 이혼할 때 숙려기간이 없었다. 합의이혼을 했다. 판사 앞에 앉았는데 내게 묻는다. 애들은 누가 키우냐고. 내가 키운다고 답했다. 육비는 받느냐고 묻는다. 안 받기로 했다고 하니까 그러면 친권은 나한테 준다고 했다. 순간 그게 뭔지 몰 판사에게 물었다.

"친권이 뭡니까?"

판사 말이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안 하니까 당연히 엄마가 친권을 가지고 애를 키워야 한다고 했다. 가슴 뭉클했다.


그는 가진 게 하나도 없다.  가진 것도 없고 빚만 있었다. 양육비를 조금이라도 보내라고 하니까,  한동안 형편이 안될 것 같다고 한다.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서 알았다고 했다.


법원을 나오면서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했다. 전화번호도 바꾸고 이사도 갈 거다.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라.

라고 말했다. 내가 워낙 강경하게 이혼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그는 속절없이 받아 들려야만 했다.


만약, 바람피운 것만 문제였다면 난 속은 쓰려도 참고 살았었거다. 내가 제일 못 견디는 건 애들한테 아버지로서의 책임감도 없고 속상한 일만 있으면 큰애를 때렸다 것이다. 신기한 건 둘째 셋째는 때리지 않았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상극이 있다는 말이 실감 났다.  한 가지는 능력 밖의 일을 벌이고 마무리는 내가 늘 한다는 사실이다. 애들이 아빠를 좋아하고 계속 찾았다면 나는 섣불리 이혼하지 않았을 거다.


이혼을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한 동안 애들한테는 아빠는 외국 갔다고 했다. 이혼 후의 생활은 별반 다른 게 없었다. 다만, 지인들을 만났을 때 우리 애들 또래의 친구들이 '아빠'하고 부르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학원도 보내지 못했고, 잘 먹이지도 못했다. 단무지와 일미채가 반찬의 전부다. 가끔은 두 마리 치킨을 시켜서 우리들끼리의 파티를 열었다.


돈이 없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아빠가 없는 것도 창피한 게 아니다. 애들 앞에힘들어하고 좌절하는 모습 보이는 게 진짜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풍요로움은 줄 수 없었지만, 편안함을 주고 싶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쉬게 해주고 싶었고, 남과 비교하지 않았다.


내 삶은 내가 주인공이다.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다.

그게 삶이다. 언젠가는 나도 어렵지 않을 순간들이 있을 거라고 믿 당당하게 살아왔다.


이런 순간들도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큰애한테는 늘 미안하다. 중학교 때부터 알바를 해서 집에 보탰다. 큰애 10살 때 이혼을 했다. 뭔가 알 나이에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제일 미안해하는 부분이다.


이혼이 결단코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난 내가 이혼하고 아이들과 사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내가 살면서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가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다.

역경을 이겨내고 부부가 한평생 살아가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들이 삶의 진정한 승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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