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밥 한 끼 먹자!

by 홍용석


춘분이 지나며 낮이 밤의 길이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에 생동감이 돌고 꽃소식이 들려오는 이 계절, 우리에게도 기적 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57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광혜원에서 모두 뭉치기로 한 것이다. 졸업 후 서울, 광혜원, 청주 등지에서 자발적인 소모임은 꾸준히 이어져 왔으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동창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전례 없는 대규모 만남이었다.

나는 청주에서 세 명의 여자 동창생과 함께 길을 나섰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들 이건만, 오늘따라 차 안에 감도는 공기가 사뭇 달랐다. 평소보다 짙게 화장을 하고, 고운 옷들을 입은 동창들의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 차 안은 마치 초등학교 시절 첫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처럼 들뜬 수다로 채워졌다. 누가 오기로 했는지, 그 친구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 얻어온 정보들을 쏟아내느라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기대와 궁금함 속에는 작지 않은 걱정도 섞여 있었다. 57년이라는 세월의 강을 건너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러던 중, 향순이가 갑자기 혜빈이 이야기를 꺼내며 대화의 물꼬를 돌렸다.

“용석아, 나 오늘 혜빈이하고 화해하기로 마음먹었어. 함께 늙어가는 처지에 서로 등 돌리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그동안 네가 중간에서 애쓸 때 진작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참 고맙고 미안하다.”

향순이와 혜빈이는 과거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어디를 가든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고, 동창 모임이 있을 때면 누구보다 신바람 나게 앞장서던 친구들이었다. 내 미원농장에 일손이 필요할 때면 친구들을 우르르 데려와 자기 일처럼 봉사해 주던, 말 그대로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던’ 우정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 사소한 말다툼이 발단이 되어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한 명이 모임에서 탈퇴할 만큼 골이 깊었고, 나와 동창들이 백방으로 화해를 주선했으나 허사였다. 그런 향순이의 입에서 먼저 ‘화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나는 오늘 이 만남이 예사롭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집결지인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 인근 한우촌에 도착하자 풍경은 가관이었다. 식당 입구는 이미 재회의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어린 시절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세월의 풍파에 옛 모습이 씻겨 내려가 이름을 물어 보고서야 무릎을 치는 이도 있었다. 이미 세상을 먼저 떠나 자리를 비운 친구들의 이름이 거론될 때는 잠시 숙연한 정적이 흐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펄쩍펄쩍 뛰며, 건강하게 살아있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인근카페 잔디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 모임 총무의 개회사로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한 순서는 먼저 떠난 친구들을 위한 묵념이었다.

“친구들아, 잘 있지? 먼저 간 너희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모였다. 너희가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그곳에, 훗날 우리가 갈 자리도 넉넉히 마련해 주려무나. 고맙다, 친구야.”

허공으로 흩어지는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이어지는 순서는 동창들이 직접 준비한 작은 음악회 ‘친구야, 밥 한 끼 먹자’였다. 남학생이 왕년에 좋아했던 여학생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전달하는 이벤트가 열리자, 광장은 박수 소리와 환호성으로 들썩였다. 색소폰과 아코디언 연주가 잔디밭에 흐르고, 트로트 경연대회 못지않은 노래자랑이 이어지자 우리 모두는 70대의 나이를 잊고 소년, 소녀로 돌아갔다. 행사의 절정은 시 낭송과 교가 합창이었다. 36회 동창을 위해 지어진 시가 낭송될 때, 우리는 57년 전의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기름진 삼천리에 새날은 밝아, 배움의 언덕 위에 종이 울린다. 모여라 동무들아 새 나라 일꾼...” 목이 터져라 부르는 교가 소리가 광혜원 하늘에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참았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단체 사진 촬영을 끝으로 아쉬운 작별을 고했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청주와 대전에서 온 친구들은 아쉬움을 달래려 저녁 식사 자리를 따로 마련했다. 오늘 행사를 갈무리하는 평가회 겸 뒤풀이 자리였다. 서울과 광혜원 임원진에게 감사를 전했고, 자주 모이자는 얘기를 하였다.

몇 년을 얼어붙어 있던 혜빈과 향순이는 대화가 조심스럽게 시작되더니, 이내 예전처럼 웃음꽃이 피어났다. 술잔이 오가고 옛이야기가 섞여 들면서 가슴속에 쌓였던 해묵은 응어리가 봄눈 녹듯 사라지는 현장을 나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과거의 상처가 아물고 다시 단단해지는 우정의 모습.

57년 만의 만남이 준 가장 큰 선물은 화려한 행사도 맛있는 음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용서’와 ‘화해’였다. ‘친구야, 밥 한 끼 먹자’라는 그 단순한 말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나는 오늘 친구들의 마주 잡은 두 손에서 다시 한번 배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다음 만남이라는 희망을 품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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