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꽃이 필 때
홍용석
봄은 왔건만 조석으로 영하의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봄의 전령이라도 된 양, 아니 마치 막중한 의무감이라도 느낀 듯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고향 집 담장엔 대여섯 그루의 산수유나무가 있다. 산수유꽃은 세상에 가장 먼저 봄소식을 타전한다. 멀리서 보면 기와집 주변을 황금으로 장식해 놓은 듯하고, 동화 속 노오란 꽃 대궐 같기도 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별들이 모여 무도회를 즐기는 것만 같다. 집을 찾는 손님이나 지나가는 나그네는 저마다 그 고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어렸을 때 산수유나무를 싫어했다. 친구와 다투었을 때나 심부름을 게을리했을 때, 엄마는 어김없이 회초리를 드셨다. 억울함을 호소해도 핑계라며 받아들이지 않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얘야, 회초리 좀 가져오너라.”
엄마의 주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담장 밑에서 산수유 가지를 꺾어 오는 작은형이 더 미웠다. 산수유 회초리는 싸리나무보다 훨씬 따갑고 아팠다. 새로 돋은 가지가 곧고 가늘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산수유나무는 그렇게 내 종아리를 다스리는 회초리로 쓰였다.
꽃이 지고 잎이 돋아날 때 풍기는 산수유 특유의 냄새도 싫었다. 잎 뒷면에 붙은 솜털은 온몸을 근지럽게 했고, 대여섯 개씩 무리 지어 열리는 파란 열매는 먹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지만 늘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입에 넣는 순간 혀와 목구멍을 찌르는 시고 떫은맛에 “우웩” 하며 내뱉기 일쑤였고, 입안은 한동안 얼얼했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여물어 가던 파란 열매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빨갛게 익어간다. 늦가을 나뭇잎이 지고 나면 빠알간 열매는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그러면 우리 집 마당은 산수유의 붉은빛과 감의 주황색이 어우러져 한 폭의 채색화가 된다. 수확은 간단했다. 바닥에 멍석을 깔고 나무에 올라 장대로 털어내면 그만이다. ‘후두득 후두득’ 우박이 내리치듯 산수유가 쏟아졌다. 가끔 장대에 맞은 놈들이 붉은 과즙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밤이면 온 식구가 둘러앉아 산수유 씨 빼기 작업을 했다. 등잔에 석유를 넣고 심지를 돋우면 방 안이 환해졌다. 종이 함지박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바가지 두 개를 앞에 놓는다. 하나는 씨를 담고, 다른 하나는 껍질을 담는 용도다. 작업은 단순하고 반복적이었다. 앞니로 씨를 물고 손으로 껍질을 분리하는 식이다. 가끔 혀끝에 과즙이 닿을 때면 시큼하고 떫으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온몸에 전율처럼 흘렀다. 앞니를 계속 써야 하니 누구 하나 말하는 이가 없었다. 바가지 부딪치는 소리와 뒷산 소쩍새 울음소리만이 고요한 겨울밤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엄마는 잘 말린 산수유 껍질을 보물처럼 다루셨다. 하얀 창호지에 정성껏 싸서 다락 깊숙이 보관했다. 장이 서는 날, 쪽 찐 머리에 비녀를 꽂고 풀기 빳빳하게 먹여 다린 한복을 입으신 엄마는 흡사 내려온 선녀처럼 고우셨다. 광혜원 장은 3일과 8일에 섰다. 다락에서 내온 산수유 보따리를 머리에 인 엄마의 뒤를 나도 졸졸 따라나섰다. 한약방에 들어서면 코끝을 자극하던 약재 냄새는 그리 싫지 않았다. 약방 할아버지는 엄마를 반갑게 맞이하며 저울에 보따리를 올렸다.
“아주 잘 말렸구먼. 질이 참 좋아.”
흥정은 필요 없었다. 할아버지는 기분 좋게 돈을 세어 건네주셨다.
“올해는 값이 좋소. 좋은 물건 가져와서 고맙구려.”
한약방을 나온 엄마와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신발 가게였다. 나는 진열장에 놓인 하얀 고무신과 내가 신은 검정 고무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엄마는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선뜻 흰 고무신을 사주셨다. 내 마음을 들여다본 엄마에게 놀라기도 했지만, 그토록 싫어했던 산수유나무가 처음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내일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엄마가 고향을 떠난 후, 산수유를 수확하는 손길은 끊겼다. 일손은 도시로 떠났고, 수작업 인건비는 산수유 값을 추월해 버렸다. 한때 귀한 약재였던 산수유는 이제 꽃망울이 터지기 전 꽃꽂이용으로 잘려 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산수유는 보약 중의 보약이라고. 내가 기력이 없을 때면 한약을 달여와 내미시며 말씀하셨다.
“얘야, 여기 네가 정성껏 따서 말린 산수유가 들어 있단다.”
약사발을 건네주시던 그 부드러운 손길과 인자한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립다. 이제 내게 산수유꽃은 매년 봄마다 가슴 한쪽을 적시는 어머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