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될 것만 같던 폭염도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한로와 상강이 지나 자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다. 가을걷이도 부지런히 마무리했다. 이제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미뤄왔던 친구들을 만났다. 53년의 정을 묵혀온 정담회 회원들이다. 우리는 지금 인천, 청주, 세종, 대전, 논산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학기 말에 결성된 모임이다. 낮에는 일터에서 땀을 흘리고 밤에는 야학에서 꿈을 키우던 학생들이었다. 두 학기 동안 정들었던 일곱 명이 의기투합해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고 약속했다. 모임 이름은 ‘정을 나누며 대화한다’는 뜻에서 정담회라 지었다. 회칙도 정했다. 회비는 월 500원, 신입 회원은 전원 찬성으로만 영입, 모임은 매월 한 번. 그 후 지금까지 추가된 회원은 단 한 명뿐이다.
모임 장소는 학교 운동장이나 대전역 앞이 대부분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음식은 30원에서 50원짜리 짜장면이나 우동이면 충분했다. 여행이라 해봐야 최소한의 비용으로 보문산, 계룡산, 금강을 찾는 것이 전부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회비는 조금씩 모여 우리의 종잣돈이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생업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대학에 합격했지만 학비가 없다며 하소연했다. 또 다른 친구는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공금과 회원 간의 금전 거래는 엄격히 금기였지만 결국 그 원칙이 무너졌다. 산업 현장에서 흔히 보던 일들이 우리 모임에도 일어난 것이다. 몇 년간 모아둔 종잣돈은 그렇게 사라졌다. 두 친구는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시련은 우리에게 돈이 아니라 정으로 뭉쳐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 이후 정담회는 더 단단해졌다.
군 입대로 자리를 비우는 기간에도 모임은 멈추지 않았다. 정담회는 묵묵히 우리의 삶을 지켜보며 동행했다. 우리의 결혼과 자녀의 혼사를 함께 축하했고, 부모 형제의 이별에는 함께 슬퍼하며 명복을 빌었다. 서로의 집을 찾아 집들이를 했고 부부 동반 여행도 다녔다. 기쁨과 아픔을 늘 함께 나누며 살아온 것이다. 정담회는 어려운 세월 속에서 우리 삶을 떠받쳐 준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창식이는 전기를 다루는 공기업에서 정년퇴직한 뒤 지금은 건물 관리 일을 하고 있다. 명기는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퇴직한 후 산림 보호 활동을 하고 있고, 영호는 방적회사 임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뒤 사회복지 활동을 하고 있다. 재인이는 공무원을 조기 퇴직하고 통신업을 하고 있으며, 병근이는 논산 고향에서 건설업을 하며 지역 봉사에 힘쓰고 있다. 나 또한 늦게나마 수필가로 등단해 글을 쓰고 있다.
이 짧은 글로 우리의 삶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크게 내세울 것은 없어도 치열하게 살아온 세월과 여전히 굳건한 우리의 모습만큼은 자랑하고 싶다.
우리는 음성에서 다시 만났다. 밤을 하얗게 새우며 정담을 나눴다. 혼기를 놓친 자식 이야기, 건강 이야기, 그리고 오래된 추억들. 모닥불은 타닥거리며 장단을 맞추고 술은 대화에 흥을 더했다.
그러나 정담의 시간은 늘 짧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회장이 봉투 하나씩을 건넸다. 봉투 안에는 오만 원권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이제부터 회비는 없습니다. 대신 모임에 오면 참가수당을 드리겠습니다.”
순간 모두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환호성이 터졌다. 그렇게 정담회는 회비 대신 참가수당을 지급하는 유쾌한 모임으로 다시 태어났다.
친구들이 떠난 뒤 나는 낙엽이 뒹구는 마당에 잠시 홀로 서 있었다. 왠지 모를 쓸쓸함이 가슴 한구석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칠순이 넘으면 회비 대신 참가수당을 주자던 오래된 약속이 어느새 현실이 된 것이다.
우리는 50원짜리 짜장면을 나누던 배고픈 학생에서 이제는 서로의 삶을 보듬고 보상해 줄 수 있는 넉넉한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