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易地思之)
홍용석
봄의 전령인 냉이, 씀바귀, 달래가 모진 찬바람을 이겨내고 굳은 땅을 뚫고 올라온다. 제때를 놓치면 생을 이어갈 수 없음을 본능으로 아는 것이다. 잡초라 불리는 식물들조차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주어진 생의 시간을 치열하게 나누어 쓴다.
나의 젊은 날도 그들처럼 뜨겁고 치열했다. 1983년, 거제 옥포는 격동의 현장이었다. 대우조선소의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이 하늘을 찌르고,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이 뿌리내릴 주거단지 조성 사업이 시작되면서, 나는 거제옥포 택지개발사업소로 발령이 났다. 현장 업무도 보상 업무도 처음이었던 내게 그곳은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낯선 땅이었다. 당시 거제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마산 터미널에서 버스로 고성과 충무를 거쳐 두 시간 넘게 달려가거나, 여객터미널에서 공기부양선인 ‘타코마호’를 타야 했다.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배로는 40분이면 닿았지만, 남해의 거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뱃길은 뚝 끊겼다. 결국 나는 사업지구 근처에 작은 방을 얻어 생활을 시작했다. 현장이 곧 삶터가 된 셈이다.
보상 업무의 핵심은 사업에 필요한 땅을 확보하는 일이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에 가깝다. 보상가가 통보되는 날이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평생을 이웃으로 지내던 이들이 옆집보다 내 땅값이 낮다며 울분을 토해냈다. 객관적 지표에 따른 보상가격이라 할지라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터전을 내놓아야 하는 이들에게 숫자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르신이 보상사무실로 들어와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그동안 공청회나 토지 조사 때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분이었다. 깊게 파인 얼굴의 주름살은 모진 세월을 이겨낸 듯하고, 몸집은 작고 왜소하지만 단단한 체구였다. 그리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작은 눈망울이 범상치 않았다. 어르신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으며 지게작대기로 책상과 타자기를 내리쳤다.
“너희가 눈이 달린 놈들이냐! 앞을 제대로 보긴 하는 거야!”
한 시간 넘게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던 어르신은 결국 기력이 다했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화조차 거부한 채 무조건 이곳을 떠나라는 서슬 퍼런 경고만 남기고 돌아갔다. 그 위태로운 방문은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다. 나는 결국 퇴근길에 소주와 안주를 챙겨 어르신의 집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며칠을 끈기 있게 찾아가자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셨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며 술잔을 채워드리자, 어르신은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나”라며 나라님을 향한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연은 기막혔다. 5년 전, 어르신은 마을 입구의 척박한 사질토 논 다섯 마지기와 깊은 골짜기의 기름진 식양토 논 세 마지기를 맞바꿨다. 당시 쌀 생산량이 비슷했기에 이웃과 좋게 합의한 거래였다. 그런데 보상금이 나오니 사질토 논에 비해 식양토 논의 가격이 4분의 1에도 못 미치게 책정된 것이다. 보상가는 도시화에 따른 토지 이용 효율과 거래 사례를 기준으로 삼았지만, 평생 흙을 만져온 농부에게 땅의 가치는 오직 ‘곡식을 얼마나 내어주느냐’에 있었다. 어르신에게 이번 보상가는 평생의 가치관이 부정당하는 날벼락과 같았다. 나는 밤이 깊도록 어르신의 하소연에 고개를 끄덕였다. 법적인 논리로 반박하는 대신 그저 듣고 또 들었다. 며칠을 그렇게 마음으로 다가가자 어르신이 먼저 대안을 물어오셨다. 나는 보상가 결정 절차를 설명해 드리고, 만족스럽지 않다면 계약을 거부하고 이의신청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상세히 안내해 드렸다. 어르신은 아들뻘인 직원이 내 마음을 헤아려주어 고맙다며 거친 손으로 먹을거리를 챙겨주셨다.
놀랍게도 어르신은 며칠 뒤 사무실에 나와 계약을 체결하셨다. 오히려 지난날의 난동이 미안하다며 굽은 허리를 숙여 사과까지 하셨다. 생산량에 기초한 보상가가 실제로는 거래 시세보다 훨씬 적을 수 있다는 현실을 이해하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류는 정리되었지만, 내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시리고 아팠다. 그때 느꼈던 갈증은 이후 내 삶의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다. 보상 업무의 첫걸음에서 그 어르신을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법과 원칙보다 앞서는 것이 상대의 처지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몸소 배웠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내 마음속에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주었다.
오늘날 조직 활성화 워크숍에서 ‘역지사지’라는 단어가 화두로 던져질 때마다 나는 옥포의 그 어르신을 떠올린다. 살다 보면 타인과 의견이 충돌하고 날 선 말을 주고받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때 단 한 번이라도 상대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엉킨 실타래 같던 갈등은 의외로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올해 가족 여행은 거제로 떠나보려 한다. 통영에서 추억에 담긴 충무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고현 포로수용소의 아픈 역사를 지나 옥포에서 하룻밤을 묵을 계획이다. 새벽 장승포항 경매장에서 푸르뎅뎅하고 날카로운 갈치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