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영어 2
저녁 6시부터 9시까지는 하루마감을 위해 헉헉대며 달리는 시간이다. 저녁을 차리고, 저녁먹는 아이들에게 똑바로 앉아라 밥과 반찬을 같이 먹어라 잔소리하고, 상을 치우고, 설거지 하고, 다음날 먹을 쌀을 씻고, 망아지처럼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차례로 불러 씻긴다. 마지막으로 각자 원하는 책을 골라 아이 둘 사이에 비스듬히 앉아 책을 읽어주고 나면 9시 즈음 된다. 잠들기 싫어 이런말 저런말 하는 아이들의 허허실실한 이야기에 맞장구도 쳐주다가 때로는 얼른 자라고 으름장도 놓다보면 어느새 아이들은 곤히 잠들어 있다. 아무리 말썽을 피우고 혼나고 했어도 잠든 얼굴은 항상 천사처럼 보여 쪽 볼에 입맞추고 싶은 충동을 꾹 참는다. 깨울까봐. 이 소중한 육아퇴근 후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첩보물에 나오는 어떤 스파이들보다도 조용하고 낮은 자세로 천천히 침실을 빠져나와 문을 닫는다. 이 고요하고 소중한 시간 미드를 본다.
아침시간은 항상 정신없이 지나간다. 7시쯤 일어나 식기세척기가 밤새 돌려놓은 그릇들을 정리하고, 아침 식사로 무엇을 줄까 고민하다보면 (주로 아침 반찬은 동그랑땡 아니면 소시지이지만 이 둘 중 무얼줘야하나 나름 심각하게 선택한다), 둘째가 스르르 일어난다. 자다 일어나 멍해져 있는 모습은 어찌나 귀여운지 끌어안고 뽀뽀하고 응대해주다보면 어느새 8시가 되어간다. 커갈수록 아침잠이 많아져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첫째의 자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마를 쓰다듬고, 일어날 시간이야 깨워주고 5분후 다시 일어날 것을 다짐받는다. 아침을 차리고,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첫째를 다독이며 아침을 먹게한다. 이제 스스로 혼자서 해야지 핀잔주면서도 학교에 늦을까 내가 불안하여 얼른 씻기고 그날 옷을 골라 입게하고 여유있게 나가려고 서두른다. 분명 등교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는데도 내 조바심에 걸음 느린 첫째를 재촉하고 얼른 학교가라며 손흘들고, 반대 방향에 위치한 유치원에 둘째까지 보내놓고 나서야 한숨돌린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면 바로 누워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걸 알기에 미적미적 공원으로 걸음을 옮겨 걷기와 비슷한 속도의 달리기를 한다. 30분가량 달리다 뛰다를 반복하다보면 이마에 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오늘도 할당량을 해치웠다라는 뿌듯함을 안고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집정리를 하고 나면 어느덧 아이가 집에 돌아오기 1시간 전이다. 서둘러 커피를 내리고 아침겸 점심을 차려 앞에 놓고는 미드를 틀어 넋나간 사람 처럼 낄낄대며 보기 시작한다.
나의 소중한 자유시간에 나는 미국 드라마나 영국드라마를 본다. 때론 유튜브를 보며 요즘 뭐가 인기인가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피식피식 웃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구경한다. 이야기 서사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내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나는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영어를 구사하는 이들을 넋놓고 바라본다.
돌이켜보면 아이 엄마가 되기 전에도, 반짝반짝한 20대 시절도 그다지 찬란하지 않게 쭈굴하게 보냈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지만 또 너무 자주 사람을 만나면 자주 지치고 피하고 싶을때도 있었다. 그런 나에게 미드는 항상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틀어놓고 아무 생각없이 낄낄대는 그 자유로움과 느긋함을 사랑했다. 눈치보지않아도 되고 늘어져있어도 되는 그시간이 참 좋았다. 그럼에도 '이거 영어공부야' 하고 안해도 되는 명분까지 만들 수 있어서 좋았다. 시간낭비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해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영어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미드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요즘 유행하는, 재밌다는 소문이 파다한 중국드라마다, 스페인드라마 등은 당췌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영어를 좋아해서 미드를 좋아하는 건지, 미드를 좋아해서 영어를 좋아하는 건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만큼 어려운 문제다.
좋아하는 미드는 일상생활물, 법정물, 의학물, 시대물이다. 추리류나 좀비물은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 프렌즈를 시작으로 위기의 주부들, 모던패밀리, 굿와이프, 그레이즈 아나토미, 하우스, 뉴스룸, 다운튼 애비, 길모어 걸스와 인생을 함께 했다. 낄낄대며 어느 정도의 표현을 알아들을 수 있는 가벼운 내용들을 주로 좋아한다. 천재 주인공들이 따라잡지 못할 빠르기로 대사를 쳐대는 미드를 보며 그들을 동경하고 사로잡히기도 한다. 자막을 틀지 않고 볼 때도 간혹 있고,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멋지다고 감탄한다. 누가 이런 내 모습을 한번 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막이 없을 때의 모호함을 참지못하고 자막을 켜고 본다.
Orange is new black에서는 crunch salad라는 표현을 배웠고, Newsroom을 보고는 I am in the middle of something 이라는 표현을 써먹게 되었다. 모던패밀리의 클레어를 보고 달리기를 시작했고, 모던패밀리의 글로리아를 보면서 비록 괴짜처럼 보이는 아들도 너그럽게 품고 귀히 여기는 마음을 배웠다. 다운튼애비를 통해서 Valet과 butler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굿와이프를 보고 Objection, Sustained같은 법정 용어들을 알게되었다.
사실 미드가 무엇을 남겼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상관없다. 내가 미드를 보는 동안 무언가는 내 안에 쌓였다고 믿고 싶다. 무언가 쌓이지 않았어도 즐겁게 시간을 보냈으면 된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