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영어 1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한다.
아무튼 식물을 시작으로 아무튼 떡볶이, 아무튼 술, 아무튼 인기가요, 아무튼 하루키, 아무튼 여름, 아무튼 메모 등등 아무튼 시리즈가 붙은 책들은 거의 보았거나 볼 예정에 있다.
아무튼 시리즈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나의 아무튼은 무엇일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져드는 아무튼, 무언가가 나에게는 존재하는가.
잠깐 자괴감이 들었다.
끈덕진 취미라곤 없는 나란 인간.
잠깐 그림공방에 다녀보기도 했고, 뜨개에 취미를 붙인 적도 있다.
미싱을 배워보고자 재봉틀을 사기도 하고, 피아노를 다시 쳐볼까 하는 생각에 라라랜드 악보집을 사기도 했었다. 요가도 다녀보고 잠깐 PT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뭐 하나 끈덕지게 한 것은 없었다.
아무튼, 00 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멋들어진 취미는 안타깝게도 찾기 힘들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건, 아무튼 육아 였다.
지금 제일 빠져 있는건 아무래도 육아니까.
아침에 일어나 밤에 아이들 재우다 함께 잠들어버리는 그 순간까지, 현재 나(aka 가정주부 또는 전업주부)의 90프로를 차지하는건 육아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육아'는 쓸 수 있겠지만 '아무튼 육아'는 쓰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00은 내가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일,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일에 관해 쓰고 싶었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퍼뜩 '아무튼, 영어'가 떠올랐다.
나는 영어에 관심이 있고,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다.
영어를 한다는 것, 영어를 하는 사람을 보는 것,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의 이야기 듣는 것들 모두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영어가 너무 좋아서 영문학과를 복수전공 했고, 10년째 휴직중이지만 영어교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열정적으로 미드를 보고 있고, 영어를 공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중이다.
'아무튼, 00'은 뭐랄까 무용하면서 아름다운 것을 적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영어 라니 들을 때 부터 재미없고, 지나치게 실용적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게 나란 인간이다.
무용한 것에 관심을 쏟기엔 이해타산적인 인간, 취미에 지나친 시간을 쓰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
영어는 그런 나에게 숨쉴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미드 보는 것도 공부고, 팝송 듣는 것도 공부니까.
알수없는 웅얼거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되는 순간, 나와 다르게 생긴 금발의 코쟁이와 웃고 떠드는 순간의 기쁨을 알려주었으니까.
그래서 아무튼 써보려고 한다, '아무튼, 영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