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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 약국 Feb 22. 2021

그녀에게 필요한 건 한 줌의 약이 아니다.

약국 일기

“속이 좀 불편하신가 봐요? 위산분비 억제하는 약, 위 장관 운동 조절하는 약, 위 점막 보호해주는 약, 그리고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 풀어주는 약, 이렇게 처방받으셨네요.”

처방전과 조제약을 확인하고 약 설명을 한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왜소한 그녀는 보통의 위장병 환자들처럼 찌푸린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다.


용법과 주의사항을 말해주며 약을 조제실에서 나왔을 때처럼 여섯 포씩 접어 지퍼 백에 밀어 넣는데 그녀의 목소리, 느릿느릿 어눌한 말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혹시, 귀화하셨어요?

처방전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몸짓과 말투가 어색해서 ‘외국인인가?’ 싶었는데 주민등록 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하니 ‘귀화’에 생각이 미쳤다.

“네, 맞아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중국에서요.”

“중국 어느 지방이요?”

중국인이라기보다 네팔이나 몽골사람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는데

“내몽골이요.”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와, 멋져요! 몽골의 초원에서 말 타고 달리는 게 내 꿈인데...”


애초에 나의 꿈은 ‘마흔이 되기 전에 서핑(surfing)을!' 파도타기를 배우는 것이었는데 이루지 못했다. 몇십 년 만에 돌아오는 행운의 상징이라며 떠들썩했던 ’ 청마靑馬‘해에 40대를 맞으며 푸르른 풀밭에서 말 타고 내달리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나의 꿈은 어떻게든 꼭 이루고 말겠다는 다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당장 어떻게든 해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은 것도 아니다. 머릿속에서 말을 타고 말들과 달리는 모습을 그려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몽골 여행, 혹은 ’ 살아보기‘를 염두에 두고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는 것도 즐겁다.


“저, 말 잘 타요. 소, 당나귀, 네 발 달린 짐승, 뭐든 다 잘 타요.”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잠깐이지만 좀 전의 느리고 자신 없는 목소리와 다르게 말(言)이 말(馬)처럼 기운차게 달렸다.

“휴~우.”

대자연에서 말을 타던 기억에서 현실로 돌아오며 그녀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 역시 상상의 말에서 내려 내 앞의 약봉지를 그녀에게 밀어주었다. 어느 정도의 친절과 건조함을 담은 직업적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용법을 설명하고...


문득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이 한 줌의 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병증에는 사연이 있다. 그녀의 위장병은 삶의 터전을 옮기고 귀화하면서 생긴 것이리라. 내몽골과 한국, 사람들의 생김새가 비슷할지 몰라도 삶의 풍경과 방식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초원에서 말 달리던 그녀에게 한국의 도시는 얼마나 답답하고 피곤할까! 잔뜩 움츠리고 긴장하고 있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는 것이다. 약은 증상을 누그러뜨리지만 병의 내력을 살필 만큼 사려 깊거나 섬세하진 않다. 증상, 아프고 불편하다는 것은 몸의 균형이 틀어졌다는 신호인데 무조건 억누른다고 몸이 좋아질까?


“말을 못 타서 위장병이 생긴 게 아닐까요? 자유롭게 말을 탈 수는 없으니 다른 운동이나 몸 쓰는 일에 재미를 붙여보세요. 걷는 것도 좋아요. 가슴 펴고 바른 자세로 오래 걸으면 속이 편해져요.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풍경이나 사람들과 친해질 수도 있겠지요. 한국 음식에 적응하려고 혹은 위에 나쁘다는 음식을 가려 먹느라 애쓰지 말고 자연스럽게 입맛에 맞는 음식들을 찾아드시고요.”


그녀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으나 검수하고 투약해야 할 약봉지들이 쌓여 있어 그러지 못했다. 대학병원 문전 약국에서 하루에 수 십 건의 처방전을 처리하다 보면 늘 시간에 쫓긴다. 처방전에 따라 정확하게 약과 용법을 전해주는 것만으로 빠듯하다. 사실 내게 주어진 일은 거기까지인데 환자들과 얼굴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왜 이런 병이 생겼을까?’ 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그녀/그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보태게 된다.


약봉지를 챙겨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그녀가 자신의 삶과 몸을 돌아보고 막힌 부분을 풀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여기에서 예전의 말 타던 기상을 떠올릴 수 있다면 위장병은 저절로 낫지 않을까?

‘우리 같이 걸을래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같이 걸으며 그녀가 살았던 고향 이야기, 나의 꿈인 말 타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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