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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 약국 Mar 14. 2021

코비드19,백신에 대하여

코로나와 백신에 대한 글을 쓰는데 뜬금없이 1년 전 프랑스 파리 여행으로부터 시작한다. 시간을 거스르고 수천 km 떨어진 먼 곳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다니 다소 난삽한 글이 될 예정이다. 그러니 제목을 보고 백신에 대해 '어쩌겠다는 거야?' '어쩌란 말이야?'라는 질문으로 글을 읽기 시작하는 독자에게 미리 말하자면 정보 전달을 위한 글이 아니고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코비드19와 백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이며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겨울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을 때 아이들과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 타이밍이 완벽했다. 근무 약사 4년 만에 약국을 인수하게 되었고 마침 둘째의 초등 졸업 선물이라며 여행 일 년 전, 정확히 361일 전에 유럽 왕복 마일리지 항공권을 예약해 두었던 터였다. 약국을 시작하면 한동안 정신없을 테고 토요일까지 일을 하기 때문에 여행은, 특히나 호흡이 긴 여행은 꿈도 꾸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들도 더 크면 각자 자기 방으로 문 닫고 들어가 버릴지도 모르니 그전에 조금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항공권을 예약할 때만 해도 여행을 기다리는 일 년 동안, 또 그 여행 이후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다니던 약국을 그만두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빠듯하게 돌아가는 약국 사정상 무급이라도 한 달 휴가를 내기란 상당히 미안한 일이다. 여행 후에 구인 광고를 기웃거리는 상상을 하다가 '일 년 후에 내 약국을 하게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미리 항공권을 예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들면 바로 가능한 일정과 최저가 항공권을 찾아내어 실행에 옮기곤 했는데 일 년 뒤 여행이라니, 여행에 대한 기대에 일 년 뒤의 불확실성까지 더해져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 년 뒤의 여행 계획은 나름 멋진 구석이 있다. 기다리는 그 일 년 동안 유럽 왕복 항공권은 보험 증서 마냥 든든하고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 정말로 약국을 인수할 기회가 찾아왔다. 친구가 십 수년 운영하던 약국을 넘기기로 한 것이다. 계약서는 여름에 쓰고 실제 양수 양도는 새해에 하자는 제안이 나로서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약국을 시작하기 전에 여행을 다녀올 수 있으니까!


중학교 1학년 첫째 아이의 학사 일정이 바뀌며 '완벽한 여행 기회'에 변수로 떠올랐다. '런던에서 크리스마스를, 파리에서 새해를!'이라며 한참 들떠 있는 내게 딸은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사실 그전부터 여행에 대해 시큰둥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었는데 '현장 체험 학습을 내면 된다.', '방송부라서 학교 축제에 꼭 참여해야 한다면 일정을 조금 바꿔보자.'라고 다독이던 상황이었다. '엄마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니 엄마는 유럽 여행을 정말 하고 싶은 것 같은데.... ', '사실 나는 가기 싫다'는 내용이었다. 유럽은 관심도 없지만 사진이나 영상으로 충분히 볼 수 있고 무엇보다 유럽을 가는 것보다 자신의 일상을 지키는 게 더 소중하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아이들도 나만큼 좋아하리라 생각했기에 속상하고 상처도 받았지만 한편 아이 스스로 이런 결정을 하고 솔직히 이야기하는 게 대견했다. 고민 끝에, 그리고 어른들의 조언과 도움에 힘입어 둘째만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첫째는 겨울 방학식을 하고 파리로 합류해서 열흘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파리 공항에서 딸과의 만남은 별로 극적이지 않았다. 아이는 침착해 보였지만 긴장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물론 반갑고 기뻤지만 나와 다른 선택을 하고 혼자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공항에 도착한 열네 살의 아이가 낯설고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방학에 집에서 뒹굴거리며 밀린 웹툰을 정주행 하는 게 여행보다 좋다'는 아이의 말이 맴돌아 속상하고 신경이 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팽팽하고 서먹했던 마음이 누그러지는 가운데 딸이 '스카프를 사러 가자'라고 말했다. 가족 여행을 무심하게 따라다니던 아이가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드러내니 반가웠다. "엄마, 프랑스 사람들은 코트와 스카프의 민족인 것 같아." 마침 지하철 전동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스카프 주의' 픽토그램이 있었다. 안전한 탑승을 위한 픽토그램이야 어디나 있는 건데 파리의 전동 계단에는 스카프 주의, 스카프가 끼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픽토그램이 있다! 순간 웃음이 빵 터졌다. '코트와 스카프의 민족'이라니, 그러고 보니 파리에는 '얼죽코'(얼어 죽어도 코트)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픽토그램처럼 스카프를 아주 길게 혹은 풍성하게 두르고 다니는 모습도 흔했다. 한국에서 롱 패딩 유행에 저항하듯 코트를 고집하던 아이는 마침 여행에도 코트를 입고 왔는데 여기에 스카프를 두르면 완벽한 파리지엔이 될 터였다.

프랑스 파리,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자본주의 대도시의 삶이 어디나 비슷하겠지, 겨우 일주일 여행하면서 뭘 기대할 수 있겠어? 라며 애써 흥분을 삼켰지만 루브르에서 들라크루와의 자유의 여신을 보고 싶었고 파리 시민들의 보편 정서라는 '똘레랑스'를 느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예상대로 짧은 여행의 경험과 판단은 어설프고 편파적이며 위험하다. 나는 호텔 프론트 직원이 흑인이라서, 그녀가 정장을 입고 당당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고 파리 시민들이 '얼죽코'이며 스카프를 휘날린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그들이 자유와 멋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버렸다.


코비드 백신에 대한 글을 쓰면서 프랑스 파리를 먼저 떠올린 건 무수한 확진자 통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백신 접종률이 낮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봉쇄령과 야간 통행금지에 맞서 횃불을 들고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2021년 1월 24일 자 한국일보 기사('백신 종주국' 프랑스인들은 왜 백신을 꺼릴까'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12217040002042)에 따르면 여론 조사에서 프랑스 국민 40%만이 백신을 맞을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 자국의 보건 정책을 불신하고 자유와 사생활이 훼손당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 나라의 정책이나 정치 상황은 모르겠지만 얼죽코와 스카프를 떠올려 볼 때 실용성보다 멋 내기를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은 자유와 사생활 침해에 예민하게 반응할 것 같다.


기사를 읽으며 작가 김연수가 <시절 일기>에서  인용한 페터 피셔의 <과학 한다는 것>의 구절이 떠올랐다.

인간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 둘 사이를 쉽게 오간다. 한쪽 세계에서 우리는 사실과 데이터를 중시한다. 사실과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우리는 항상 새로워지는 기술적 방법의 도움을 받는다. 다른 쪽의 세계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괴로워한다. 특히 인생을 즐기는 순간에 우리 몸의 유전자적 구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관심도 없다. 이쪽 세계에서 우리는 과학을 추구한다. 저쪽 세계에서 우리는 플루트를 연주하고 시를 읽는다. 전자의 세계에서는 정보를 구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인용문에 이어지는 작가의 글을 옮겨와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말을 지금까지 쓴 글과 연관 지어 쉽게 풀어쓰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천연두 바이러스는 일단 접촉하면 그게 누구든 감염시킬 뿐 예언도 운명도 모른다고. (한 문장 생략) 그 사실에 무지할 때, 인간은 두 세계 중 하나의 세계에서만 살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고 왜 죽는지 주술사만이 대답할 수 있는 그 세계에서는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이 글에서 '천연두'를 '코비드 19'로 바꾸면 '시절 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일기가 된다. 그리고 이는 속사정 잘 모르는 남의 나라 상황이라기보다 특정 종교 집단으로 인해 몇 차례 위험을 겪었던 우리 자신의 이야기에 잘 들어맞는다. 과학적 사실과 데이터를 무시한 종교 지도자로 인해 불행한 몇 차례의 전염병 파동을 겪지 않았나.


완벽한 타이밍의 유럽 여행을 마치자마자 약국을 인수했다. 타이밍이 얼마나 완벽했냐면 우리가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그 날, 국내 최초의 코로나 환자라고 알려진 그 이도 인천공항에서 입국 절차를 밟고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와 함께 시작한 약국, 완벽한 타이밍은 이제 최악의 타이밍이 되었다. 알코올, 체온계, 마스크 대란을 고스란히 겪었고 내과, 이비인후과 환자가 많다 보니 항상 바이러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실제로 확진자가 다녀간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역학 조사를 당할 때마다 얼마나 두렵고 아찔했는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난다. 


강박적으로 손을 씻고 주변을 소독하고 마스크를 꾹 눌러쓰면서 외식, 모임을 하지 않고 시계 추 마냥 약국과 집 만을 오가며 일 년을 살았다. 여행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던 일들이 까마득히 먼 옛날 같다. 

작년 스위스 여행 생각나? 뮈렌에서 썰매를 신나게 탔었지. 라우터브룬넨 숙소로 돌아올 때 기차를 잘못 타서 그린델발트인 줄 알고 내렸는데 다른 역이었어. 스키 타는 사람들만 잔뜩 있었던. 2층 식당에서 먹었던 뭐였더라, 치즈와 감자가 어우러진 그 음식, 거기에 따뜻한 글루바인 한 잔 마셨는데...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까, 미래를 기약할 수 없을 때, 현실이 우울해질 때, 여행의 기억은 미치도록 달콤하고 유혹적이다. 목구멍을 따라 뜨겁게 내려가던 과일향 나는 적갈색의 액체, 추위와 허기에 주린 몸을 든든하게 채워주었던 음식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떠오르면 기억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마스크를 쓰는 현재의 일상이 꿈처럼 아득해진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고 그들은 나를 '확진자'라고 부른다. 지난 일주일 간 내가 갔던 장소, 내가 만난 사람들, 머릿속 저장 공간을 찾아보기도 전에 신용카드 내역과 시시티브이로 내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심지어 내가 무의식적으로 마스크를 내렸다가 올린 사실까지도 말해준다. 곧이어 하얀색 방역복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집안을 소독하고 나는 격리된다.

지난여름 약국에 처음으로 확진자가 다녀가고 한동안 내가 확진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우리 지역에서 확진이 많이 될 때였다. 아침마다 오늘은 어디서 몇 명 나왔고 그이를 통해 어떻게 또 다른 전파가 일어났는지가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시 홈페이지에서 확진자 동선을 확인하려면 늘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우리 약국이 공개되고 그 밑에 악성 댓글이 달릴까 봐 두려웠다. (어느샌가 확진자 정보 공개 수위와 방식이 달라지고 댓글 기능이 없어졌다.) 


OO시 OO구 OO동 X0대 여(남)성, 우리 약국을 다녀간 확진자가 생활 치료 센터에 입원(입소)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내가 그이가 되는 상상을 했다. 무증상이나 경증의 코로나 확진자들이 격리된다는 생활 치료 센터라는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괴하게 느껴졌다. 기괴함의 근원에는 바이러스가 우리의 지각 능력을 벗어난 존재라는 사실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 만지거나 느낄 수도 없이 감염되고 전파된다는 사실. 지각할 수 없는 위험 때문에 겹겹이 쌓고 차단하고 격리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그 장면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이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부자연스럽고 부조리해 보이는 이 상황에서 누군가 "하하하, 임금님이 벌거벗었네!"라고 말해준다면, 이 모든 게 꿈이고 하나, 둘, 셋을 외치며 다같이 깰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최근에 다녀간 확진자는 20대 청년이었다.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종교 집단 관련자라는 걸 시 홈페이지에서 알았다. 역학 조사관이 그이의 이름을 말했을 때 말갛게 예쁜 얼굴로 불안을 드러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틀 동안 동네 의원, 약국을 돌아다닌 무책임한 행동에 모두 분노했는데 그이의 불안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연민이 느껴졌다. 두렵구나, 두려워서 그랬구나.


고백하건대 한때 나는 백신 회의론자의 주변을 맴돌았다. 내 삶에 백신이라는 주제가 들어온 것은 아이들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예민했던 둘째는 아토피가 심하고 알레르기가 있었다. 외부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니 뭐든 조심스러웠고 생후 6개월까지 맞혀야 하는 접종표를 따라가기가 벅찼다. 

모임이나 온라인 카페에서는 백신의 위험을 경고하는 이야기가 돌았다. MMR 백신과 자폐증의 연관성을 밝힌 BBC 다큐멘터리가 있다는 것이었고 DPT, MMR 같은 혼합 백신은 면역계를 교란시킬 위험이 있다고 했다. '자연' 상태에서 홍역-볼거리-풍진이 동시 감염되는 경우가 있겠느냐고 되묻는 것이 근거 논리였다. 수은, 포름알데하이드 같은 독극물이 백신의 첨가제로 들어간다는 사실은 공포를 부추겼다. 

언제부턴가 '자연', '자연주의'라는 말은 이상적이고 완전한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아토피와 알레르기 심한 아이의 엄마에게는 디프테리아, 파상풍, 백일해 같은 낯선 이름의 전염병보다 환경오염과 화학 물질의 위협이 심각하게 느껴졌다.

친한 친구는 어릴 때 시골 보건소의 부주의로 유효 기간이 경과한 백신을 맞고 죽을 뻔했다는, 자라면서 자신의 부모로부터 들은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우리 둘째와 같은 해에 태어난 또 다른 친구의 아이는 접종 후 알레르기 반응이 심각하게 왔는데 두세 가지 백신을 동시에 맞아서 어떤 것이 문제였는지 알 수 없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일본에서 홍역이 유행한다는 기사를 보았다.(검색해보니 '홍역 도쿄 확산… 대학가 휴교 ‘홍역’ , 한겨레 기사가 나온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211180.html#csidx96f0e7186f96a20992eb894bde62acf) 일본에서는 홍역이 의무 접종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접종률이 낮아진 것이 유행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홍역이 의무 접종에서 배제된 것은 MMR 백신의 부작용 소송에서 국가가 패소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홍역 유행 소식을 전했던 몇몇 언론은 일본이 백신 후진국이라며 우리의 접종률을 자랑했는데 나는 오히려 우리가 백신의 부작용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한편 사라진 것 같았던 홍역이 다시 창궐하는 걸 보며 '자연' 상태가 늘 위험을 내포하고 있고 무조건 최선의 가치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접종을 하지 않아 병에 걸릴 확률과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확률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명쾌한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0.001% 확률의 심각한 부작용이 내 아이에게 나타난다면? 발현율이 낮지만 예측할 수 없고 내 문제가 됐을 때는 100%의 위력을 갖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한 항체 없이 살아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에 필수 접종은 되는대로 맞혔다. 위험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그리고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알레르기 반응이 무엇 때문인지 밝혀낼 수 있도록 한 번에 한 가지만 맞도록 했다. 예방 접종하는 날엔 무척 긴장되곤 했는데 토하거나 열이 나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MMR 백신과 자폐증 의혹을 제기했던 영국 의사 웨이크필드의 논문은 실제로 연관성을 밝히지도 못했을뿐더러 의사 윤리에 어긋한 연구 과정과 방법 때문에 영국 내에서 의료 행위를 금지당했다고 한다.)


'약사님, 백신 맞아야 돼요?' 본격적으로 코비드19 백신이 도입되면서 약국에 오는 환자들이 종종 내게 묻는다. 아무리 건강한 어른이라도 주사라는 침습적인 행위에 두려움과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게다가 불과 일 이 년여 전에는 알지 못했던 바이러스의 습격이 팬데믹으로 이어지고 부랴부랴 급하게 만들어진 백신의 효과와 안전성에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리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갖가지 소문과 가짜 뉴스를 접하게 된다. 백신 이전에도 한 번씩 <긴급>이라고 시작하는 단체 문자를 보여주며 진통제를 종류별로 사거나 '이버멕틴', '클로로퀸'을 찾는 분들이 있었다. 백신과 관련해서는 부작용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많고 백신을 맞지 않아도 비타민 C와 같은 영양소로 예방이 가능하다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한다. 단체 문자에는 늘 OO대 교수, 의사, 한의사 등의 전문가 누구 씨가 등장하는데 전문가가 썼다고 볼 수 없는 조악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나는 그들의 믿음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혹시 이 분이 OO대학교에 실제로 계시는지 알아보셨어요? 교수님이 직접 쓰신 게 아닌 것 같아서요.' '글쎄요, 한의사가 면역학의 전문가일까요?', '그래서 전 국민이 비타민C를 먹으면 코로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O, X와 같은 명확한 답을 원하지만 나 역시 답을 구하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힌다. 팬데믹의 종결을 원하는 개인이자 약사로서 책임 있는 대답을 하기 위해 백신에 대한 논문과 기사를 열심히 읽고 있다. 허가 임상과 다른 나라의 실제 임상 자료를 볼 때 백신이 가장 효과적이며 걱정했던 것만큼 위험하지 않은 것 같다. 65세 이상에서 중증 발현율이 높기 때문에 고 연령층에서의 접종이 중요한데 최근의 스코틀랜드 연구를 보면 고 연령층에 있어서 효능이 매우 안정적이라고 한다. ( https://www.facebook.com/jaehun.jung.md/posts/3859146760870394) 부작용과 안전성도 데이터를 보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0.001%의 부작용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작용이 나와 내 가족에게 나타난다면?' 하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고백한다. 80대 부모님이 접종하는 날엔 둘째가 예방접종을 하던 그날처럼, 그 이상으로 떨리고 긴장될 것 같다. 


미국과 유럽 등 먼저 접종을 시작한 나라들로부터 백신의 효능과 안전성 데이터가 보고되는 것을 보면 수 백만, 수 천만의 데이터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뭉클해진다. 두려움에 맞서 접종을 선택했던 이들의 데이터가 접종을 앞둔 이에게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가 집단 면역에 도달할 수 있을지,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질지, 풍토병으로 남을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앞서 인용한 <과학 한다는 것>의 구절처럼 우리는 '새로워지는 기술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사실과 데이터를 모으고' 이로써 '정보를 얻어 답을 구하는' 노력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플루트를 연주하고 시를 읽기 위해서'임을 믿는다. 

전염병은 세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 또한 소수의 희생이나 노력으로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율라비스의 '면역에 관하여(율라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의 마지막 문장을 전하며 이 글을 맺는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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