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읽는 약국 May 14. 2021

백신을 맞고 대기실에 앉아

into the unknown

백신을 맞고 대기실에 앉아 최근 가장 사치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체르마트,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이곳에서 빙하 특급 열차를 타고 알프스를 유람하는 것이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빙하특급을 타기 전에 이틀 동안 수네가 전망대를 오르고 썰매를 타려고 했으나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무려 여섯 달 전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마지막 남은 객실입니다'라는 문구에 충동적으로 예약한 호텔이 너무 좋았다. 창문으로 마테호른 봉우리가 아침마다 붉게 물들고 밤하늘에 은은하게 빛나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스키어들이 장비를 싣고 떠나고 관광객들이 산악 열차를 타러 갈 때 늦잠을 자고 펭수 동영상을 보다가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방향 감각이 둔하고 길치인 데다 런던에서 구입한 유심이 잘 되지 않아 늘 길을 잃었다. 덕분에 어떤 계획이나 인터넷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지냈다. 기웃거리다 들어간 식당의 음식 맛이 좋았다. 루체른에서 유람선을 탔을 때 옆에 앉은 할머니들이 하던 보드 게임을 사려고 서점, 문방구, 기념품 가게를 찾아다녔다. 카드를 연결해서 그림을 완성하는 게임이었는데 이름을 몰라 짧은 영어로, 그림으로 그려 열심히 설명하다 보면 시간이 후딱 갔다.

오후에는 호텔 테라스에서 아들이 눈을 뭉치고 노는 모습을 보며 느긋하게 글루바인 한 잔.


유럽 여행을 마치자마자 약국을 시작했는데 때마침 전염병이 창궐했다. 내과, 이비인후과 문전이라서 코로나가 늘 가까이 있다. 확진자 동선에도 몇 번이나 걸렸다. 내가 감염되어 바이러스 전파자가 되거나 밀접 접촉자가 되어 격리될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 약국에 아크릴 가림막을 설치하고 추운 날씨에도 자주 환기를 하고 수시로 소독을 했다. 모든 직원이 KF94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착용하고 약국 안에서는 물을 마시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누구나 그랬지만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행은 무슨, 일 년 넘게 수영장에 못 가고 외식도 못하고 가족, 친구들도 제대로 못 만나고 있다. 어느 날은 퇴근길에 약국 뒷골목을 걷다가 식당과 노천카페에서 삼삼사사(5인 이상 집합 금지니까 삼삼오오 대신 삼삼사사)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고 나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침 확진자 수가 줄어 방역 단계가 낮아졌을 때였다.

'우리만 집에 있나 봐. 우리도 한 번 모이자.'  지역에 친한 약사님들과 용기을 내어 만나기로 하면 갑자기 확진자 수가 두 자릿수로 늘거나 주변 상가에 확진자가 다녀가는 바람에 약속은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해를 넘기고 또 몇 달이 지나 이제는 백신 맞고 마음 편히 만나자고 약속을 한다.


약사와 약국 직원은 우선 접종 대상이라서 4월 마지막 주에 1차 접종을 마쳤다.

안전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나는 백신 접종을 고대하고 있었다. 위험한 부작용이 있어도 확률은 아주 낮고 '코시국'에서 벗어나는데 백신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는 과학자와 통계학자의 데이터를 믿기로 했다. 백신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 가장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솔직히 코로나에 대한 피로감이 이제는 목까지 차올라, 어떻게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접종 주간 열흘 전쯤에 신청 접수 안내 문자가 왔고 약국 여건상 백신 휴가를 낼 수 없으니 주말을 앞두고 그나마 한가한 목요일 오후로 예약을 했다. 근무 약사님들도 목요일, 금요일로 예약을 하셨다. 예약을 하고 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니 기대 반 걱정 반 마음이 떨렸다. 게다가 접종 주간 직전에 직원들까지 우선 접종자로 포함시키는 결정이 내려져 급하게 예약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약국은 월말, 월초에 환자가 다소 몰리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 주, 하필 가장 바쁜 시기에 모두 백신을 맞게 되다니! 몹시 긴장이 되었다. 혹시나 백신 부작용으로 공백이 생길까 봐 급히 연락했을 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알아 놓았다.


예상대로 월요일에 바빴다. 아니, 예상보다 더, 평소의 마지막 주 월요일보다 더, 무슨 일인지 명절 연휴를 앞둔 날처럼 바빴다. 코로나로 인해 줄어든 조제건수가 회복이 되나 싶어 내심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에선 불안이 스멀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화요일이 되자 보건소에서 2번이나 연락이 왔다. 월요일에 확진자가 1시간 간격으로 두 명이나 다녀간 것이다. 예민하게 방역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시시티비를 돌려보면 늘 아찔하다. 확진자 A는 약을 받아 들고 그 자리에서 바로 먹으려 했는데 우리가 약국 내에서 복용하시면 안 된다고 했더니 물을 떠서 약봉지를 들고 약국을 들락거렸다. 너무나 다행히도, 그 바빴던 날에, 몰리지 않을 때였고 밀접접촉자가 없었다. 그 사람이 우리말을 듣지 않고 약국 안에서 마스크 벗고 약을 먹었으면? 밖에서 약을 먹는다고 들락거리며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았으면? 다른 환자와 접촉이 있었으면? 충분히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아슬아슬 잘 넘겨서 다행이었다. 역학 조사원들에게 씨씨티비를 보여 주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월요일에는 바빠서, 화요일에는 역학조사로, 전쟁 같은 이틀을 보냈다. 그 와중에 집안일은 왜 이렇게 많은지. 시간을 쪼개어 아들 데리고 치과를 다녀오고 아이들 담임 선생님과 상담 전화를 하고 화장실 변기까지 말썽을 부려 수리 기사를 불러야 했다.

'오늘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울고 싶었는데 울 틈도 없었어. 집에 들어가자마자 울어버릴 거야. ' 화요일 저녁 퇴근길에 전화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전화를 끊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집에 막 들어서는데 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다. 월요일의 두 번째 확진자 동선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또다시 울 틈도 없이 역학조사를 받으러 약국을 갔다. 다행히도 두 번째 확진자는 잠깐 혈압약만 받아 가신 분이었다. 약국에서 씨씨티비를 확인하고 역학 조사원을 기다리는데 약사들끼리 학술 정보를 나누는 단톡 방에 어떤 약사님의 사연이 올라왔다. 나처럼 백신 접종을 이틀 앞두고 있었는데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은 '코스크' 확진자와 5분간 대화를 하는 바람에 밀접 접촉자가 되었다고, 백신도 다음으로 미루고 자가 격리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기대하고 기다렸던 백신 접종 이틀 전에 이 무슨 봉변인가. 백신을 맞는다고, 더군다나 1차 접종으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지만 백신 접종 이틀을 앞두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정말 속상할 것 같다.

다시 퇴근, 정말 퇴근. 울 힘도 없이 기진맥진 쓰러질 기세로 집에 왔는데 집에 오면 신기하게 기운이 난다. 아이들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엄마, 밥 줘.'

'내가 밥이냐? 내가 네 밥 주려고 사는 사람인 줄 아냐? 눈치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밥을 내놓으란 말이냐?'

타박을 해도 둘째 녀석에겐 내가 여전히 '밥'이다. 요즘엔 눈치를 살펴가며 '엄마, 나, 뭐 먹어?'라고 묻는다.

약국 일을 마치고 아이들도 학원을 다녀오면 늘 늦은 시간에 저녁을 먹는데 평소보다 더 늦게 저녁을 먹었다.

'나, 플레이팅 잘하지 않아? 예쁘지? 엄마 먹어.'

과일을 예쁘게 담은 접시를 슬쩍 내미는 따님.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이랑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긴장과 피로가 스르르 풀렸다.


다시, 백신을 맞고 대기실에 앉아

백신과 방역에 흠집 내는 기사들에도 불구하고 백신 센터는 분주하고 활기차 보였다. 접종 후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마음이 들뜨고 뿌듯했다. 주사를 맞는 동안 절친들이 전시회를 핑계로 모여 노는 걸 카톡으로 보고 있으려니 배가 아프다. 약국 하는 후배들이랑 2차 접종 끝내고 뷔페에 가기로 약속을 한다. 마스크 벗고 웃고 떠들고 싶다.


2020년 새해 첫날, 스위스를 여행하고 있었다. 루체른에서 유람선-산악 열차를 타고 리기산에 올랐다. 유람선에서 날씨가 너무 흐려 시야가 좋지 못했다. 산악 열차를 탈 때만 해도 잿빛 풍경이었는데 열차를 타고 가파르게 산을 오르는 중에 어느 순간 믿을 수 없게 쨍한 하늘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 눈 앞에 나타났다. 구름을 통과해서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나니아 연대기의 아슬란의 세계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동화 속 천상의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반전이었다. 전망대까지 오르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일단 중간 역에 내려서 놀았다. 아이가 눈밭에서 뒹굴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을 흩뿌리는데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Into the unknown~' 아이가 저도 모르게 '겨울왕국 2'의 ost를 흥얼거렸다.

답답하고 힘들 때, 앞이 보이지 않고 깜깜할 때, 도무지 한 발짝도 뗄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루체른의 반전 풍경을 떠올린다. 안갯속에 있으면 세상이 어둡고 눈에 보이는 어둠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용기 내어 조금 더 앞으로 나가면 분명 다른 세계가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져본다.

작가의 이전글 코비드19,백신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