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딸, 엄마

동생들의 엄마

by 초이

[쌈닭] 싸움닭의 준말, 유의어로 투계가 있다


엄마 대신, 아빠 대신


“엄마 아빠가 없을 때는 선희가 엄마, 아빠 대신이야.”

부모님은 자주 그렇게 말했다. 어린 선희 씨는 그 말이 마치 대단한 지위와 권력을 부여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맞벌이 부부의 장녀로서,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학교가 파하면 놀이터에서 뛰놀거나 문방구를 기웃거리는 일은 그녀와 무관했다. 동생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면, 하원차량이 멈추는 집 대문 앞에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언니이자 누나인 선희 씨는 곧 엄마가 되었다.


부모님은 아침마다 전화기 아래 작은 용돈을 숨겨두고 출근했다. 하원한 동생들과 군것질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슈퍼에 가면 늘 비싼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동생들 덕분에 선희 씨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동생들이 다 먹고 난 뒤 빈 포장지만이 그녀의 차지였다.




동생들이 차례로 같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선희 씨의 ‘엄마 노릇’은 학교 안에서도 이어졌다. 이국적인 생김새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던 여동생은 자주 언니의 교실로 울며 찾아왔다. 당시 유행하던 만화 [개구리 왕눈이] 속 캐릭터 ‘투투’가 여동생의 별명이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의 놀림이 이어졌다. 그러면 선희 씨는 곧장 동생을 놀린 아이들을 찾아가 화를 냈고, 때론 치고받고 싸움까지 했다. 그렇게 그녀의 별명은 ‘투투 언니’에서 ‘투투의 쌈닭’으로 바뀌었다.


남동생 때문에도 그녀는 곧잘 남동생의 담임선생님에게 불려갔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남동생의 담임선생님은 부모님 대신 누나인 선희씨를 호출했다. 남동생의 반 친구들 앞에서 동생과 함께 혼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선희 씨는 남동생의 숙제를 더 열심히 챙겼지만, 비슷한 일은 반복되었다. 돌이켜보면, 담임선생님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부모님에게였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선생님께 선물을 전하기 시작한 순간, 선희 씨가 호출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니까. 이 시절 김영란법은 없었다.


김영란법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 청탁 및 공직자 등의 금품 등 수수를 금지하는 법률




음주가무를 좋아했던 부모님은 일주일에 두세 번은 집을 비웠다. 아이들 셋을 남겨두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린 동생들은 부모님 없는 밤이 무서웠고, 그것은 선희 씨도 마찬가지였다. 집 밖에 있던 화장실에 혼자 갈 수 없던 아이들은 결국 방 한켠의 요강을 이용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요강을 비우고 닦는 일은 언제나 선희 씨의 몫이었다.


그때 선희 씨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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