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아메리카노 두 잔과 브라우니를 시켜놓고 바 자리에 앉아 물었다.
"너는 주위에 어른이 있어? 믿을만한"
"응 많지~"
믿을만한 어른. 딱히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좋은 어른은 어떻게 만나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되는 걸까.
수시로 대학교에 합격하고 친구들이 수능을 준비하는 동안 시간이 생겼다. 대학생이 되면 이제 용돈은 알아서 벌어 쓰라는 부모님 말씀에 (학창 시절에도 용돈을 따로 받은 적은 없다. 명절에 모아둔 돈을 조금씩 아껴 썼다.)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첫 아르바이트는 집 앞 10분 거리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커피 체인점이었다. 40대 초반 남자가 사장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노후준비로 카페를 시작했다며, 불안한 마음에 매일 출근했다. 아르바이트를 한 번도 해보지 않는 내가 못 미더웠는지 시시콜콜 감시하고 훈수를 두었다. 나는 다행히 일머리가 좋고 손이 빨라 적응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옆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우유를 흘리고, 사람이 몰리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장 때문에 나도 정신없기 일쑤였다.(사장은 참 일을 못했는데 꾸역꾸역 나와 아르바이트생을 힘들게 했다.) 시간이 지나니 스킨십이 잦아졌고 급기야 허리를 잡거나 엉덩이를 툭툭치고 (우리 아빠도 안친다 이 자식아..) 치마를 입고 온 날에는 '다리가 안 예쁘다', 화장을 하지 않은 날에는 '화장 좀 하고 와라' 등 점점 참견의 도가 지나쳤다. 20살도 되지 않는 나에게 대학교에 가면 원나잇은 꼭 해봐야 한다고 듣고 싶지도 않은 자기 경험을 늘어놓는가 하면, 가끔 부모님이 딸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카페에 오는 날에는 나를 포스기 앞으로 밀며 '네가 돈 받아. 내가 가면 서비스 줘야 할 것 같잖아'라고 했다. 참 지금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히지만 그때는 여기서 잘리면 일자리가 없는 줄 알았다. 같이 일하는 남자 동료들에게는 내가 꼬리 치고 있으니 조심하라며 헛소리를 했단다. 남자 동료들은 늘 나에게 사장이 한 헛소리를 전해주며 그냥 상종 못할 인간이니 말을 섞지 말라고 위로했다. 제일 기가 막혔던 것은 마감시간에 아내가 딸 두 명을 데리고 들어왔고, 아이들은 '아빠~'하며 품에 안기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딸도 있고... 하하...
두 번째는 피자 펍 아르바이트였다. 2년간 일했는데, 동료들 덕분에 버텼지만 참 더러운 꼴 많이 봤다. 지나가며 엉덩이를 만지고 가는 손님, 피부를 지적하는 주방 직원 (거울을 보고 너나 해라 제발 좀), 머리 묶으니 별로라며 지적하는 아르바이트생 등등.. 입이 아프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그지 같은 어른 투성이었다. 40대 남자 사장은 나에게 '00 씨 나 다음에는 롯데리아 가게 낼까 봐. 왜인지 알아요? 주 고객층이 고등학생이잖아 ㅎㅎ 고등학생 만날 수도 있잖아~' 하는데 비위도 맞춰주기 싫어 무표정으로 빤히 눈을 쳐다보니 '아 농담이에요~'하고 갔다. 언제 봤다고 피자를 가져다주자 오늘 밤 부산에 같이 놀러 가자고 하는 외국인 남자, 벨을 계속 누르면서 '물 좀 한 잔 더 주세요'하고는 '야 봤어? 봤어?', '엥? 내 타입 아닌데 ㅋㅋ'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남자 두 명. 나중에는 여자 두 명이 들어왔고, 와이프라며 서로에게 소개했다. 기가 막힌다.
세 번째는 작은 일식집과 야간 스크린 야구장 아르바이트, 이렇게 투잡을 뛰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모양이니 방어기제가 생겼다. 6개월 동안 일했던 일식집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일만 했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점심 식사정도만 챙겨주었다. 문제는 스크린 야구장이었다. 사장은 나를 보더니 '스크린 야구장은 술을 마시고 2차로 오는 손님들이 많다, 그러니 네가 요령껏 술을 더 팔면 인센티브를 주겠다'라고 했다. 저 술 팔러 온 거 아닌데요..? 하.. 지긋지긋하다. 정말 술에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많이 왔고, 한 무리는 나보고 같이 치자며 방에서 못 나가게 문 앞을 막았다. 거구들이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순간적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행히 매니저님이 cctv로 상황을 목격하고 나를 꺼내주었다. 이 외에도 게임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내 뒷모습을 보며 키득키득거리고 쑥덕거리던 말들, 계산하고 나가며 일로와 보라던 손짓들. 내가 만난 어른들은 죄다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더 적었다가는 기분이 잡칠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굉장한 방어기제를 갖는다. 숱하게 당하고 겪어 쌓인 데이터가 내 두터운 방어기제를 만들었다. 그래서 종종 좋은 인연을 만날 기회를 놓칠 때도 있다. 너무 심한 방어기제로 다가오려다가도 달아나버린다. 사실 좋은 인연이었을지 아닐지는 모른다. 겪어보기도 전에 관계가 끝나버려서.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시며 내가 되묻는다.
"네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란 뭐야?"
"음... 자기가 좋은 어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다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거지. 그저 경험이 좀 더 많으니 저기 표지판이 있어하고 힌트를 주는 정도랄까. 그리고 지켜봐 주는 거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음..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그럼!"
누군가 다가오면 분명히 대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30년 후, 나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데 과연 나는 대가 없이 누군가에게 선뜻 힌트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방어막을 좀처럼 풀기가 어렵다. 어쩌면 나는 모든 사람을 쉽게 믿어버려서 더 상처 입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좋겠다. 슈가슈가룬에 쇼콜라가 브이를 하면 하트모양이 다 보였던 것처럼.
https://www.youtube.com/watch?v=A8LkqOY6pE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