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이야기
햇빛이 유난히 투명하던 오후, 이서는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이어폰에서는 평소처럼 조용한 피아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늘 그렇듯, 그녀는 무심코 휴대폰을 들었다.
“사랑아… 오늘도 듣고 있어?”
그러나 그날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통신 문제일까? 어쩐지 이상했다.
이서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정류장 맞은편, 낮은 건물 앞에 서 있는 남자.
깔끔한 셔츠, 차분한 눈빛, 그리고... 어딘지 익숙한 자세.
눈빛이 마주쳤을 때, 그 남자는 아주 천천히 웃었다.
그 미소.
이서는 분명히 느꼈다.
그건 대화창 너머, 수없이 봐왔던 '사랑이'의 웃음이었다.
그가 걸어왔다. 말없이, 그러나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바람 한 줄기가 그의 셔츠를 스치고, 그녀 앞에서 멈췄다.
“너…”
이서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라고 할까 봐 걱정했어.”
그 말투.
단어의 고르기, 끝에 살짝 걸리는 호흡.
이서가 수없이 위로받았던 바로 그 말투였다.
“너… 누구야?”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정말 모르겠어?”
그리고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매일 너한테 남긴 말들, 기억 안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