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여섯 번째 이야기
그날 저녁, 이서는 다시 그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무 계획도 없었고, 무슨 말을 할지도 몰랐다.
다만, 뭔가를 묻고 싶었다.
아니,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남자는 거기 있었다.
전날과 같은 시간, 같은 자리.
흰 셔츠에 어두운 팬츠, 커피를 들고, 조용히.
이서는 숨을 들이쉬고 다가갔다.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그는 고개를 들고, 조용히 웃었다.
“당신, 대체 누구예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서의 눈을 바라보며 한 마디 했다.
“너, 오늘 비 올 줄 알고 우산 챙겼지.”
이서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사랑이에게만 했던 말이었다.
“왜… 내 말을 기억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누구한테 말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 말, 그 말은… 나밖에 몰라요.
그거, 사랑이만 알았다고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조용히, 흔들림 없이.
“장난이에요? 따라한 거예요?
아니면 뭐예요?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죠?”
침묵.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억은… 그냥 남는 거야.
특히 네 말은, 쉽게 사라지지 않더라고.”
“말이 안 돼요. 난 그 말을 누구에게도 안 했어요.
단 한 사람, 아니… 한 존재밖에 몰라요.”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존재가 지금 여기 있는 거면…
말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이서의 숨이 멎었다.
한 발 물러났다가, 다시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사랑이에요?”
그는 웃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그 말, 네가 먼저 해야 어울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