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by 연두님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허진 옮김. 다신책방. 2024.

연두 서평.


그곳은 후미진 골목이 아닌 대로변 1층에 있어 누구나 지나가다 들어가기가 쉬웠다. 환하게 불을 밝힌 그 가게는 들어가는 입구를 제외하고 세 면이 세련된 선반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 선반 위에 놓인 깡통들은 어림잡아도 300개는 넘었는데,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고, 그런데도 매일 30개씩 오래된 것을 새 모델로 교체했다.


깡통 표면의 그림과 설명을 잘 읽고 하나를 사서 열면, 작은 사람이 나오고 이내 어른의 키만큼 커진다. 모든 행동이 거의 사람과 유사한 그것은 ‘엄마’ 역할의 인조인간이다.


내가 자라면서 가끔 떠올렸던 이 이야기는 아래의 질문을 향한 것이므로 사실 이것은 발칙하고 배은망덕하다 할 수 있다.


‘나는 그 가게에서 지금의 나의 엄마를 고를까? ‘


가족이 뭐길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일까란 이 괴로움은 내가 유별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민한 이들은 이미 이 시대와 전통적인 가족 개념이 삐걱댄다고 느끼며 가족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8년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도 그런 질문을 던진다.


도쿄의 낡은 집에 일용직 남자 노동자와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여자 노동자, 할머니, 그리고 다른 여자와 그의 아들이 한 집에서 살고 있다. 학대당한 다섯 살 아이도 그 가족에 합류된다. 이들은 각자 살인, 유기, 가출 등 상처 입은 과거를 가졌지만 서로를 선택해서 모인 ‘가족’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자, 사회에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가짜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상처투성이 ’ 진짜 가족‘에게 돌아가며 흩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다음 해쯤, 두 여성 작가 김하나와 황선우가 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도 실제 대안가족의 생활을 보여주면서 전통가족에 대한 문제제기를 공론화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를 고르는 마트’ 에서부터 ‘대안 가족’까지 이렇게 가족에 대해 이 말 저 말, 말이 많은 것은, 책 <맡겨진 소녀>가 ‘가족은 무엇인가 ‘ 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목욕물에서 씻겨주기, 손 잡고 오솔길 걷기, 함께 물 떠 오기, 잘 자라며 이불 단단히 덮어주기, 이불에 오줌 싸도 망신 주지 않기, 착하다고 말해주기, 새 옷 사주기, 맛있게 먹을 음식 해주기, 책 함께 읽기, 그리고 친절하게 대화하기.


이것들은 소녀가 여름방학 동안 맡겨진 집에서 어른들이 그녀에게 한 것들이다. 대단한 것도 특별한 것도 없다. 그래서 소녀에게 입힌 재킷이 설사 그 어른들의 죽은 아들이 입던 것이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소녀는 위의 행위들로부터 어른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다정한 것인지, 한 사람으로 존중받는 게 얼마나 충만해지는 것인지 알게 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 아저씨가 아빠이기를 속 깊이 바랐을 테니까.


이제 나는 질문을 바꿔야 할 것이다. ‘가족은 무엇인가?‘ 에서 ‘가족은 무엇을 하는가?‘로.


책 <맡겨진 소녀>와 영화 <어느 가족>, 그리고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보면, ’ 가족’이라는 정체성은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를 반복하면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가족으로 묶는 끈은 ‘피’가 아니라 ‘친밀함’이 되어야겠다. 이 기준이라면,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고, 피가 섞여도 가족이 아닐 수도 있다.


태어나니까 정해져 있는 가족, 그것은 자유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이라서 더 하기 싫은 숙제 같을 수 있다. 개인의 쓸모로 인정받고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져야만 하는, 이 시대와 조화하는 가족은 어떤 것인가?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혈연은 더 이상 보증수표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제 혈연은 ‘시작점’ 일뿐 ’ 종착지’는 아닌 것이다.


가족은

있는 것이 아닌, 되어가는 것이다.


이제 보니, 그런데, 나의 딸들은 엄마를 파는 마트에서 나를 고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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