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by 연두님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카렌 암스트롱. 정영목 옮김. 푸른숲. 2022.

연두 서평.


아침 6시 20분, 오늘도 모닝커피를 마시며 서서히 잠을 깨고 있는 시간, 윙~윙~ 전화가 울린다. “연두야, 나 죽을 거 같아! 초조하고 불안해서 미치겠어!” 요즘 들어 엄마는 하루에도 여러 번 내게 이런 전화를 건다. ”이렇게 살아 뭣하니?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죽었으면 좋겠어!” 여든셋의 작아진 몸에서 나오는 떨림과 울음이 내 세상을 뿌옇게 흔들어 놓는다.


엄마만 그런 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명랑해 보이던 연극하는 친구는 몇 해 전부터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그리고 내 올케 둘과 그 외 친구 여럿은 오랫동안 우울장애와 불안장애로 본인은 물론 식구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커다란 덩어리가 몸속 배를 움켜쥐는 느낌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당장 운동장으로 뛰어 나가 쓰러질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려 그 덩어리가 사라지면 그제야 겨우 숨구멍이 트였던, 그게 시작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헤맸던가?


그 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찾아낸 것들은 이런 것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한다. 아침저녁, 긴 호흡으로 수영을 한다. 책을 쌓아놓고 항상 읽는다. 불안을 달래는 나의 방법들이다. 극복하는 방법은 아니다.


언제나 바랐었다. 나도 무한대의 평화를 얻고 싶다고.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는 붓다 사후 200년이 지나 기록된 ‘팔리어 경전‘ 을 참조해서 깨달음의 과정과 그의 일생을 재구성한 책이다. 이 시대의 뛰어난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이 사람 붓다가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새로운 인간형이 되는지 자세히 쓰고 있다.


붓다 석가모니가 태어난 기원전 6세기말은 철기가 만들어지면서 원시 공동체가 시장경제로 바뀌어 도시화되는 시기였다. 개인주의가 시작된 새로운 세상에 대해 사람들은 불안과 깊은 공포와 소외를 느꼈다고 한다. 그 철기의 새 시대에,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란의 조로아스터, 중국의 공자와 노자, 인도의 부처 같은 천재들은 세상을 해석할 새로운 언어와 개념들을 만들어서 불안한 사람들을 이끌었다.


‘축의 시대’라 부르는 그 시대는 지금의 분위기와 너무도 닮아 있는데, 그래서 나는 이 책의 붓다가 방법을 줄지도 모른다고 슬쩍 기대했다.


우선, 내가 이해한 것은 이렇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괴로움‘ 은 ‘욕망’ 때문에 만들어진다.


그런데 세상의 본질은 ’ 변하는 것’이다.


세상의 본질이 변하는 것이므로, 세상에 속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생각과 욕망, 행복도 변한다. 잠시 생각만 해 보아도, 이것들은 사실 아주 짧은 시간만 있다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욕망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한다. 아, 덧없는 세상이다.


자아도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적 실재가 아닌 망상인데도 ”개인적 우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는 것, 바로 이것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열쇠이다.


사실 나는 독후감을 쓰려면 책을 최소 두 번은 읽어야 한다. 그것은 처음 읽을 때는 내 자아가 지나치게 많이 비쳐서 작가의 그림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아가 비대해져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음, 어지럽다.


붓다가 제시하는 수행 방법은 ‘명상요가’이다. 자아를 넘어선다는 것은 무의식까지 통제해야 하는 것이므로 아주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뇌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 명상‘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속설처럼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훈련이다.


그것은 깊은 호흡을 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 관찰’하는 훈련법이다. 스스로 사유가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하는 ’ 메타 인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은 ‘자기 중심주의’ 필터가 사라진 채로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자아로부터 비워진 공간은 다시 ‘동정심‘으로 채워야 한다. 타인에게도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보듬으며 품어주는 것이다.


예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티벳스님들의 명상법에 대한 인터뷰가 있었는데,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세상의 고통은 다 가져오고, 길게 내쉴 때는 그 숨에 자신의 모든 사랑을 담아 그것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가 닿는 것을 상상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붓다가 말한 ‘동정심의 요가’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 누구라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붓다는 말한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것이어서 집을 ‘떠나’ 수행 공동체에서 매일매일 훈련을 해야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못 벗어나고는 내 책임이라는 얘기 아닌가? 지금 시대의 불안은 개인들이 행하는 모든 것들을 각자의 능력에 대한 각자의 책임으로 해석하기 때문인데.. 입에 쓴 침이 고인다.


하지만 나는 위대한 성인이 아니니까,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 자아, 감정, 의식이 쉼 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며 계속 변하는,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한다면, 그것도 충분히 좋은 것이리라 생각하며 깊은숨을 길게 뱉어 본다.


이 책을 덮고,

내가 불안할수록 책을 미친 듯이 읽었던 이유는 나의 마음과 현기증 나는 이 세계를 설명할 언어를 찾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그것들을 이해할 개념이 필요했다.


새로운 시대 앞에서 모두의 불안은 당연하다. 그런 우리에게는 ’ 축의 시대‘의 사상가들이 한 것처럼 지금의 불안한 세상을 설명할 다른 언어와 개념, 즉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해석하는 틀을 바꾸고 대안적인 언어를 만들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언어를 함께 쓴다면, 우리의 불안은 사그라들지 모른다.


불현듯,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노자 같은 천재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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