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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양 Jul 03. 2023

프라하, 너는 낭만이었다.


'프라하'라는 이름에 낭만과 로맨스가 묻어난다. 프-라-하. 발음에도 부드러운 여운이 남는다. 프라하에 가면 사랑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프라하에서는 아름다운 청춘들의 사랑이 샘솟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프라하의 첫인상은 이러한 기대감을 단번에 깨뜨렸다. 길을 물어도 제대로 답해 주지 않는 사람들. 말도 걸기 전에 영어 못한다며 손사래를 친다. 겨우 찾아간 에어비앤비의 집 상태는 사진과 완전히 달랐다. 취사시설은 엉망이었고 따뜻한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난방시설은 작은 라디에이터가 전부. 데워지지 않는 공기에 패딩을 입고 양말까지 신으며 잠을 청했다. 이런 집에서는 예약한 일주일이나 지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주인 할머니에게 상황을 이야기하니 갑자기 두 눈을 부릅 뜨고 소리를 지른다. 상냥했던 어제와는 너무 다른 모습으로. "Get out! Right now!!"


고약한 할매의 행동에 황당한 우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짐을 싸서 나왔다. 집의 편안함은 무슨, 그냥 저렴한 호스텔이나 가자. 관광지와 떨어져서 조용히 지내고 싶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비를 맞으며 시내의 호스텔을 찾아갔다. 데스크의 젊은 언니가 상냥하게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가격도 에어비앤비보다 훨씬 저렴하다. 4인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침대 하나씩 잡고 일단 누웠다. 고약한 할매 덕분에 프라하의 낭만은 개뿔이 되었다. 슬슬 여행도 피곤하고 한국 가서 김치찌개나 한 그릇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방에 한국인 한 명이 들어온다. 장기 여행자인지 부스스하고 서두름이 없다. 오랜만에 한국인을 보니 반가웠다. 그 여행자는 대뜸 근처에 있는 'MOMMY'라는 식당에 가보란다. 김치찌개 맛이 정말 기가 막히다면서. 김치찌개가 먹고 싶던 찰나에 김치찌개 맛집이라니. 우리는 벌떡 일어나 그 식당을 찾아갔다. 김치찌개와 순두부찌개를 하나씩 주문했다. 여행 중 한식당은 처음이었지만 그래봐야 외국이니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 잠시 후,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가 등장. 오, 뚝배기라니 생각보다 괜찮은데? 뜨거운 연기를 후 불며 숟가락으로 한입 떠본다. 국물을 맛보자마자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맛.있.다. 흰밥에 쓱쓱 비벼가며 밥 한 공기를 다 비워냈다. 어느새 고약한 할매의 심술은 다 잊혀졌다.


프라하에 있는 동안에는 비가 자주 내렸다. 나름 운치는 있었지만 공기는 무거웠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는 반팔을 입었는데, 어느새 두툼한 긴팔을 꺼내 입고 있다. 여행이 길어지고 어느덧 일상이 되다 보니, 여행의 설렘에 무뎌지고 있었다. 슬슬 몸도 지치고 집 생각도 났다. 유럽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당들을 마주할 때의 감격은 형식적으로 바뀌었다. 처음의 에너지와 열정이 사라지자, 나는 그저 목적 없이 떠도는 방랑자와도 같았다. 며칠 후면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나는 남은 여행을 혼자 이어가야 했다. 프라하의 흐린 골목을 걸으면서, 난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몰랐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날 밤, 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먼저 잠든 친구를 두고 혼자 1층 바(bar)로 내려왔다. 낮에는 카페로 운영되고 저녁에는 작은 펍으로 바뀌었다. 몇몇 사람들이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자리를 잡고 음료 한 잔을 시켰다. 소음이 있는 장소에서 나만 혼자 침묵했다.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앉았다. 아까 만난 한국인 여행자였다. 김치찌개 맛집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김치찌개 한 그릇으로 시작된 대화가 한국 이야기로 바뀌었다. 외국을 여행하며 느끼는 한국에 대해서. 그동안의 한국 생활에 대해서, 꿈꿔온 것들에 대해서, 마침 흘러나오는 음악에 대해서, 가치를 찾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나와 너에 대해서. 밤새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대화는 음악을 따라 움직이며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것을 대화라고 한다면, 난 지금까지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몇 시나 되었을까. 몇 시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펍의 한켠에는 피아노 하나가 놓여있었다. 나는 슬쩍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노래. 하지만 내 안에 있던 음정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만큼 손가락도 움직였다. 다시 치고 싶어도 칠 수 없는 음악. 오로지 그 순간만 부를 수 있었던 노래와 허밍이 공간을 가득 채워갔다. 함께 나눈 몇몇 사람들의 작은 박수 소리. 새벽에 나누었던 대화와 노래야말로 프라하의 낭만이었다. 모자라지만, 그래서 충분했던 연주를 마치고 나는 방에 가서 잠이 들었다.


그 밤 이후, 나는 다시 여행의 순간순간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실패하지만, 실패는 향기롭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조금 더 용감해지고, 조금 더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었다. 프라하를 떠나는 마지막 날, 강물 위에는 햇빛이 한가득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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