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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양 Jul 03. 2023


터키 고등학교 단상에 서다.


이스탄불에 사는 친구가 있다. 이름은 세레나이(Selenay). 나는 터키를 여행 중이었고 세레나이는 관광지에서 여행자들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 만난 우리는 8살 나이 차이에도 금방 친구가 되었다. 나는 터키를 사랑하고, 세레나이는 한국을 사랑했다. 세레나이는 한 번도 한국에 와보지 못했지만, 유튜브와 영화를 통해 한국어를 독학했다. 내가 한 번씩 터키를 방문할 때마다 우린 꼭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유럽여행의 마무리를 터키에서 하기로 했다. 다시 방문한 이스탄불. 술탄아흐멧의 붐비는 그 거리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언니!" 풋. 이 먼 이국땅에서 누군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다니? 돌아서니 반가운 얼굴이 서 있다. 수많은 인파에 치이면서도 그동안의 안부를 묻느라 바쁘다. 식사하면서도 음식이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탄아흐멧 트램 역 앞


"언니, 내일 우리 학교에 올 수 있어?"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이스탄불에 머무는 며칠 동안 세레나이는 나를 매일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학생인 세레나이는 당연히 학교에 가야 했다. 선생님께 외국인 친구가 놀러 오는데 하루만 결석해도 되는지를 물었다 했다. 그러자 도리어 선생님은 그 외국인 친구를 학교로 초대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업 시간에 친구들에게 한국을 간단히 소개해달란다. 황당한 세레나이의 말에 그야말로 '벙찌고' 말았다. 당황하는 나에게 세레나이는 "플리즈~언니"를 외치며 조르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생각 좀 해보자고.


결국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만 머리가 하얘졌다. 영어도 잘 못하고 터키어는 아예 못하는데 어쩌지. 일단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기로 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고.. 27살이고.. 지금 여행 중이고.." 세레나이가 불러주는 대로 터키어를 한글로 받아 적었다. 또 한복, 경복궁, 김치, 불고기 등의 이미지를 찾아 한국을 소개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우리는 내일 학교에서 만나기로 약속 후 헤어졌다.


다음날, 긴장된 발걸음으로 학교에 도착했다. 벌써 세레나이는 정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보자마자 어찌나 좋아하며 뛰어오는지. 세레나이가 웃는 걸 보니 오기를 잘했다 싶다.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학생들의 시선이 온통 나를 향한다. 복도에 가득한 학생들은 나를 졸졸 쫓아오면서 사진부터 찍자고 한다. 아, 이런 관심은 처음이야. 내가 연예인이라도 된 것 같다. 터키 현지 고등학교에 갑자기 한국 배낭여행자가 오다니. 서로에게 꽤 재미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세레나이는 나를 교장실로 먼저 인도했다. 교, 교장선생님까지?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맞아 주신다. 통역은 세레나이가 맡았다. 교장선생님은 왜 터키에 왔는지, 어디를 여행 중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여러 가지를 물어보셨다. 친히 간식까지 차려 주시더니 사진 한 장 찍자고 하신다. 어색한 기념촬영까지 마친 후, 드디어 세레나이의 교실로 갔다. 벌써부터 학생들은 우르르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담임선생님도 포옹으로 반겨 주셨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나는 학생들 앞으로 나갔다. 두근거리고 긴장된다. 여행하다 말고 갑자기 고등학교 단상 앞에 서다니. 기가 막히지만 피할 길도 없다. 어제 세레나이가 불러 준 대로 받아 적은 종이를 꺼냈다. 떠듬떠듬 읽어 내려간다. 내가 "메르하바! (안녕)"라고 하자마자 학생들도 "메르하바!" 외친다. 간단하게 한국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학생들은 '케이팝'에 관심이 많았다. 선생님은 88올림픽 때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들의 환호와 나의 긴장감, 또 낯설지만 새로운 경험의 열기가 뜨거웠을 뿐이다.


금세 수업 시간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나는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친구들은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나 역시도 짧은 만남이 아쉬웠지만 며칠 남지 않는 여행을 조용히 정리하고 싶었다. 내일모레면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여독을 풀고,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친구들과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고 학교 문을 나섰다.



"언니, 와줘서 정말 고마워"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세레나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세레나이는 이 헤어짐이 견디기 힘든가 보다. 다시 꼭 만나자고 하지만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나를 한번 안고는 뛰어가 버리는 세레나이의 뒷모습을 덤덤히 쳐다보았다. 아직 마음이 여리고 어린 소녀구나. 그 모습이 사라질 때 즈음, 나도 뒤돌아 걸었다.


일상을 잠시 멈추고 떠나온 여행길. 이 여행의 마지막에 참 특별한 순간을 만났다. 낯선 이방인들에게 평범한 나의 이야기를 전했고, 내 나라를 알려줬다. 서로가 눈빛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나의 작은 이야기에 반짝이던 눈빛들. 내가 용기를 잔뜩 얻고 간다. 이제는 진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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