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하면 안 돼?ㅎㅎ
너무 억울하다. 시현 오빠에게 말린 게 틀림없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까지 좋아할 생각은 없었는데. 시현 오빠는 절대 내 이상형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는 흑발에 깐머리에 눈썹이 예쁜, 그리고 쌍꺼풀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리고 오빠처럼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런 나르시시스트는 싫다.
그런데 자꾸 생각난다. 지금 뭐하는지 궁금하고,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고 싶고.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자신의 기준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왠지 멋있고 닮고 싶고. 일상에 배인 작은 배려들에 설레는 것 같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말 그대로 '현며들고'만 것이다.
목요일은 여느 초여름의 하루처럼 후덥지근했다. 곧 다가오는 장마 때문인지, 마치 수영장을 걷는 기분이었고 술집과 가게들이 모인 신촌의 거리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기운을 흡수하는 듯했다. 연세로에 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밖에 없는 거리는 여름의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빛을 흡수해 열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부채를 팔락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걸었고, 마침내 시현 오빠와 동기 재민이와의 약속장소인 올리브영 앞에서 재민이를 먼저 만났다. 재민이는 나처럼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마찬가지로 더위에 이미 지친 듯 보였다. 몇 주 전 새로 염색한 갈색머리와 헤드폰의 색깔이 같았고, 납작한 얼굴과 큰 코, 지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놀기 위해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 초롱초롱한 눈이 저 멀리서 나를 보자마자 반짝였다.
"야 오랜만이다!"
종강하고 며칠 지나 나와 재민은 시현 오빠에게 보은을 하기로 했다. 선배님이 밥을 사주시는 '밥약'에 대한 보답으로, 학기 초에 받은 밥약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밥약을 하고 나서 빠른 시일 내에 보은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이번 학기는 유독 세 명이 맞는 시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종강하고 나서야 겨우 만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습한 공기 때문에 푹 가라앉은 앞머리를 만지며 인사를 했다. 며칠 전 탈색 머리를 검은색으로 덮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앞머리 볼륨을 살리기 너무 어려웠다. 어깨까지 오는 이른바 '거지존'의 머리 그날 아침 몇 시간 동안 고데기로 펴주었었던지라 날씨 때문에 뻗치는 머리카락이 계속 신경 쓰였다. 곧 있으면 시현 오빠도 올 것이라는 생각에 내 모습이 의식되었고, 재민이와 올리브영 앞에서 기다리며 화장을 확인했다. 검은색 머리와 잘 어울리도록 브로우로 색을 입히는 대신 가만히 놔둔 잘 정리된 눈썹, 한 올 한 올 영혼을 담아 위로 곧게 뻗도록 만든 속눈썹, 진한 쌍꺼풀 위 세심하게 바른 핑크빛 베이스의 셰도우... 끝이 약간 동그란 내 코를 보완하는 셰딩 그리고 셰도우와 어울리는 핑크빛 블러셔와 입술까지 확인 완료. 윗입술 경계선 위로 약간 더 올라가도록 06호 쿨톤 핑크의 어뮤즈 틴트를 한 번 더 바르며 천연덕스럽게 내가 말했다.
"시현 오빠 만나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언제 올까?"
사실 나는 시현 오빠를 만나는 것이 오랜만이 아니었다.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단둘이 생각보다 자주 만났다. 함께 카페에서 공부를 하거나 영화를 본 적이 있었고, 칵테일 바를 가기도 했다. 바로 전 주에도 함께 칵테일을 마셨다. 물론 어떤 생각으로 서로 만났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시험기간 중에 심심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받기도 하고. 최근에 가장 많이 연락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다. 물론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얘들아, 안녕. 둘이 어떻게 같이 있었어?" 옆에서 등장한 오빠가 말했다.
"어 오빠! 오랜만이야 진짜. 나 방금 재민이 만났어." 숨길 수 없는 반가운 눈빛과 약간 들뜬 목소리로 내가 답했다.
시현 오빠를 보는 순간 날씨로 인해 가라앉은 기분이 좋아졌다. 다운펌이 되어 있는 자연흑발과 건정색 뿔테 안경이 먼저 보였고, 높은 코와 얇은 입술의 시 오빠는 집에서 선크림도 열심히 바르고 향수도 뿌렸는지 땀 흘리는 우리와 대비되는 뽀송한 모습이었다. 지난주에 같이 산책을 했을 때 요즘 피부관리에 관심이 생겨서 유튜브를 통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피부도 깨끗했다. 옷은 흰 티셔츠 위에 소라색 반팔 셔츠를 위에 입고 있었는데, 점심을 우리와 함께 먹고 저녁에 대외활동 뒤풀이가 신촌에 있다고 하더니 나름 신경 쓰고 온 것 같았다.
"평소에도 옷을 신경 써서 입는 편이야, 나를 만나다고 그런 건 아닐 거야, " 스스로 되뇌었다.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다시 쿠션을 꺼내 거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억눌렀다. 그리고 주름 하나 없는 티셔츠를 열심히 폈다. 왜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별로가 되고, 화장도 너무 과한 것 같을까?
'왜 연락을 안 보지? 아직도 뒤풀이 중인 건가. 아니면 나를 보기 싫은 건가? 점심에는 분명 분위기도 좋고 재미있었는데...'
애꿎은 휴대폰을 노려 보며 오만가지 생각에 잠겼다. 저녁에 취미로 다니는 홍대 화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신촌으로 돌아왔다. 바로 집에 갈 수도 있었지만, 시현 오빠가 신촌에서 대외활동 사람들과 뒤풀이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뒤풀이가 끝나는 시간과 맞아떨어지면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다시 연세대학교로 향했다.
푸릇한 나무들이 두 줄로 펼쳐진 백양로를 천천히 걸으면서 학교에 온 이유를 스스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그저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남아서 학교 근처로 돌아온 것이었고, 집으로 가는 버스도 학교 앞 정류장에서 타는 것이 편했다. 그리고 원래 밤에 백양로를 산책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절대 오빠를 마주칠 수 있는 그 작은 가능성 때문에 이곳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밤 10시 30분. 뒤풀이 끝났으면 놀아달라는 카톡을 보낸 지도 두 시간이 넘었다. 이 사람은 카톡을 읽지도 않았다. 이십 분만 더 기다리고 그래도 답장이 오지 않으면 버스를 타기로 굳게 다짐했다. 이미 물음표로 끝나는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에 더 이상 보낼 수도 없었다. 이미 절박한데, 여기서 더 구질구질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의 연애 빅데이터에 의하면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연애경험치 2주에 불과한 스몰 데이터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절박하다는 것을 티 낼수록 상대방은 질려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오 분쯤 기다리고 나서 백양로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여름이었지만 밤공기는 차가웠고 벤치의 촉감도 서늘했다. 주변 벤치에는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커플들이 앉아 있었고, 서둘러 집에 가는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났다.
그저 그렇게 가만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문득 내 모습이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집에 가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고, 만약에 설령 시현 오빠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한 시간도 안되어서 헤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새로운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놀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속상한 마음 반, 애타는 마음 반이었다.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지 오빠는 꿈도 꾸지 못하겠지. 나한테 그렇게 관심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렇게 목 빼고 기다리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 다그쳤다. 밤 11시. 어느덧 삼십 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벤치에서 일어나 괜히 바지를 털었다. 그리고 정문 밖을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띵.
에어팟을 통해 카톡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음이 울리자마자 허겁지겁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아니다 다를까, 시현 오빠였다. 날짜와 시간 아래 익숙한 채팅 아이콘이 있었고, 그 옆에는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저 아직 뒤풀이 중...'
당연히 아직 뒤풀이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말 아쉬웠다. 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잠금을 풀지는 않고 잠금화면을 통해 아직 뒤풀이에 있다는 한 문장의 카톡 메시지를 뚫어져라 보았다.
'오자마자 메시지를 확인하면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니까 십 분만 있다가 답장해야지.' 에어팟을 통해 들려오는 데이먼스 이어의 노래가 네 곡이 끝나도록 기다렸다. Yours. Josee!. Auburn. 샛별.
'아하 그렇구나'
조금 더 고민한 이후에 덧붙였다.
'너무 아쉽다'
별로 기다리지 않았는데 곧이어 답장이 돌아왔다.
'수업 끝났어?'
술자리에서 틈틈이 휴대폰을 보고 있는 건가? 카톡이 와서 그냥 확인하는 건가?
'아까 끝났어서 물어본 거였어! 지금 버스 타고 집 가는 중이야' 가라앉은 기분이 티 나지 않도록 괜히 느낌표를 써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히 들어가라는 메시지가 왔다. 실망하면서 창 밖을 바라봤다. 창 밖으로 내 모습이 반사되었는데, 입꼬리는 한참 내려가 있었고 눈은 지쳐 보였다. 턱은 한껏 나온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문장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에 어떻게 해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질질 끌고 있는 관계에 지쳐서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일 수도 있고, 연애프로그램에서 사람이 술을 마시면 솔직해진다는 말을 들은 것이 떠올라서 술 마신 이 사람의 마음을 떠 보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항상 나만 아쉽지?'
이 정도면 낼만큼 티를 냈다. 됐다. 코를 통해 공기를 한껏 들어마시고 입으로 내쉬었다. 눈을 감은 채로 휴대폰 옆 면에 무음모드 버튼을 눌러 알림이 와도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그리고 볼륨을 키워 머릿속이 데이먼스 이어의 목소리로 가득 차도록 만들었다. 순간순간 심장이 빨리 뛰다 못해 먹먹했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바다에 들어가 숨을 참고 버티는 기분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까지.
'ㅋㅋㅋㅋ집에 잘 가고 있어?'
결국 참지 못하고 화면을 확인했다. 오늘 하루만 휴대폰을 몇 번을 뒤집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정확히 알면서 이렇게 답장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한번 심장이 뛰었다. 설렘은 아니고,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대한 당황스러움? 답답함? 밀당에는 영 소질 이 없는 나는 볼을 꼬집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내가 머리에서 쥐어짜 낸 최대의 밀당 멘트였다.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하면 안 돼?ㅎㅎ' 거의 곧바로 오빠가 메시지를 보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KO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