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꿈에서처럼 여기서도 유령들, 죽은 이들, 현실과 믿음의 모습들이 돌아다니고, 가능한 것과 소망스러운 것, 달콤한 것과 두려운 것이 고요한 어스름 빛 속에 손에 손을 잡고 나타난다. 일부는 윤곽도 없이 어둠 속으로 스러지고, 일부는 표현을 통해 상징으로 올라선다. 매일 밤 이런 꿈들을 꾸고 싶고, 해마다 이런 종류의 책을 한 권씩 새로 받고 싶다."
그가 이토록 찬탄한 작품은 중국 청나라의 포송령이 민간 설화인 귀신, 도깨비, 신선 등의 기이한 이야기를 묶어서 쓴 '요재지이'(聊齋志異)다. 그러면서 헤세는 이렇게도 적었다. "우리 서양인들은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설명하거나 흉내 낼 수 없다. 정말로 섬세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헤세는 동양 문명에 대한 지적 관심과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에 그쳤지만 21세기의 안무가 앙줄랭 프렐조카주는 이 환상에 도전했다.
비를 피해 오래된 절을 방문한 여행자 주효렴과 맹룡담이 절에 묵으면서 오래된 프레스코화(벽화)를 보게 되고 주효렴은 그 벽화 속 긴 머리의 여인에게 반한 나머지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 주효렴은 긴 머리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도 하지만 이내 의문의 남자들한테 쫓기게 되면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설화에서 남자가 긴 머리의 여인에게 매혹당한다고 나오는만큼 프렐조카주도 긴 머리의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즉 이 작품에서 발레리나들의 긴 머리는 내용의 흐름을 만들어나가고 여러 느낌과 감정들을 극적으로 연출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프렐조카주가 무용 음악으로 선택한 니콜라 고댕의 전자 음악은 작품의 판타지 요소를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어서 무용 음악과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 그리고 무용수들의 춤에 공간감을 환상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 주효렴은 나른하면서도 에로틱한 자세로 앉아있는 여인들을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감상자도 여인들이 발산하는 관능미에 아찔함을 경험하게 된다. 벽화 속으로 순간 이동한 남자가 긴 머리의 여인과 부유하듯 추는 춤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진짜 꿈 속처럼 마법같은 장면이다. 머리카락 움직임이 중요한 이 작품에서 앞뒤로 또는 좌우로 물결치는 여인들의 긴 머리는 관능적이면서도 격렬한 춤사위가 된다. 여인들의 머리카락 군무는 이윽고 메이폴 댄스와 같은 춤으로 이어진다. 주효렴과 사랑에 빠진 긴 머리의 여인이 기둥처럼 서있고, 다른 여인들이 그 여인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잡고서 춤을 추며 꼬아 만든 머리는 어느새 올림머리가 된다. 여인의 긴 머리가 올림머리를 했다는 것은 곧 결혼을 한다는 뜻이다. 긴머리에서 올림머리를 한 그 여인은 주효렴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식을 올린다. 꿈속에서 꿈을 꾸듯 여인과 함께 잠이 든 주효렴은 드디어 현실세계로 쫓겨난다. 꿈에서 깨어보니 모든 게 다 꿈이었다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고가는 이 작품은 감상자에게도 몽환적이고도 아름답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