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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 서연 Sep 30. 2024

마농 레스코 & 춘희

소설과 발레 작품 비교


<마농 레스코>     

"사랑하는 슈발리에, 당신은 내 마음의 우상이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당신밖에 없다고 맹세해요. 하지만 가여운 내 사랑, 당신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정조란 어리석은 미덕이라는 사실을 모르겠어요? 빵이 없어도 우리에게 애정이 넘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자신의 쾌락을 채워줄 늙은 부호 G.M의 애인이 된 마농이 데 그리외에게 이런 편지를 남기고 달아나버린다. 처음에는 이런 마농의 모습에서 거부감이 강하게 들면서 ”아무리 발레 작품의 원작을 읽기로 했어도 그냥 책을 덮을까?“를 여러 번 고민했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이 <오만과 편견>을 심리학 관점에서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났다.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이 책을 심리학 관점에서 읽기 시작하니 그제서야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이런 식으로 소설 속에서 마농이 반복하는 패턴이 있는데, 그 패턴을 심리학 용어로 대입하면 이렇다. 데 그리외에게 ‘러브 바밍’ 폭격, 쾌락에 탐닉,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또다른 이성을 탐색, 환승 연애, 그러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이성에게 "여전히 사랑하지만 돈이 없어서..."라고 피를 말리는 말과 동시에 가끔은 데 그리외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비난’을 하거나 ‘후버링’도 하면서 자신으로부터 못 빠져 나가도록 ‘어장관리’도 한다.     


<마농 레스코>와 <춘희>를 읽고 느낀 점을 비교, 정리를 하기로 하고서 <마농 레스코>를 다시 펼쳤다. G.M의 애인이 된 마농이 데 그리외에게 남긴 편지의 뒷 부분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것만은 믿어주세요.....나는 나의 슈발리에를 부유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일할 테니까요.” 어째서 마농은 자신이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하는 환승 연애가 데 그리외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이러한 설정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들면서 궁금증이 더욱 증폭되었다. 도대체 소설이 나올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아베 프레보가 이 소설을 발표했던 1731년은 미술사에서는 ‘로코코 양식’이라고 불리우는 시대이다. 장엄한 바로크 양식이 사라지면서 귀족들의 취향은 사치스럽고 경쾌한 스타일로 바뀌었다. 앙투안 와토의 연애 그림들, 프라고나르의 호화스러운 연회 그림(페트 갈랑트), 프랑수아 부셰의 시누아즈리 연작 시리즈(프랑스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중국식 취향을 담은 그림들)가 대표적이며 그 중에서 부셰가 로코코 양식의 정점을 찍었다. 루이 15세의 코르티잔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를 자주 그렸던 부셰는 그림 속 모델이었던 퐁파두르와 함께 로코코 양식을 꽃피웠다.      

앙투안 와토, <키테라섬의 순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프랑수아 부셰, <시누아즈리>


평범한 집안의 딸이었던 퐁파두르는 그녀의 어머니 역시 코르티잔이었는데, 어머니의 인생이 딸에게도 대물림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퐁파두르는 코르티잔을 넘어서서 루이 15세가 정치적인 식견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지성과 교양을 겸비했었기 때문에 왕은 그 공을 인정하여 후작 부인의 작위까지 내렸다. 왕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던 그녀는 학식과 미적 감각을 두루 겸비한 로코코 시대의 여왕이었다.   

프랑수아 부셰,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
프랑수아 부셰,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
프랑수아 부셰,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


하지만 이토록 화려했던 로코코 시대에는 또다른 이면도 공존했다. 프랑스의 화가 시메옹 샤르댕은 언제나 검소하고 소박한 서민들을 주로 그렸는데, 놀랍게도 부셰, 프라고나르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이다. 다음은 발레 <마농>의 안무가 케네스 맥밀란의 아내인 데보라 맥밀란의 인터뷰 내용이다. “맥밀런 경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당시 곤경에 처한 여성들이었어요. 구제해 줄 곳은 없었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여자들은 딱히 큰 선택지가 없었어요. 만약 여자의 용모가 아름답다면 보호자를 자처하는 남자들이 빠르게 소유권을 주장했죠.”, “맥밀런 경이 친구이자 디자이너인 게오르기아디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걸인들이 가득한 장소가 그려진다고요. 게오르기아디스는 무대 디자인에 시종일관 누더기를 이용했어요. 부자들의 호화스러운 삶 저 아래에 보잘것없고 가난한 인생들이 있죠. 여차하면 그쪽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어요.”,“맥밀런 경은 언제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에 매료됐어요.”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설거지를 하고 있는 하녀>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시장에서 돌아옴>


아름다운 소녀들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모들이 소녀들을 수녀원에 보내는 것이었다. 주인공 마농 역시 부모의 계획에 따라 수녀원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마농의 뛰어난 미모는 그만 데 그리외의 눈에 띄고 만다. 아름다운 마농을 본 순간 불꽃같은 사랑을 느낀 데 그리외는 마농에게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권유한다. 이렇게 해서 둘의 질기고도 서로 파멸해가는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데 그리외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했지만 마농의 타고난 향락적인 성향으로 인해 생기는 갖가지 사건 사고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마농은 특별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는 그 어떤 여자보다 돈에 덜 집착하는 편이었지만 돈이 부족하다는 두려움이 생기면 한순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쾌락과 오락이었습니다.”(p. 66), “그는(마농의 오빠인 레스코) 마농에게 쾌락을 위해 바싼 대가를 지불하는 늙은 호색한 G.M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p. 72) 이렇듯 카톨릭 사제이면서도 풍운아처럼 살았던 저자 아베 프레보는 개인적인 경험에 당시 향락에 몰두했던 프랑스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풍자로 녹여냈다.      


24년 상반기에 공연했던 발레 <마농>에서 연출을 맡았던 라우라 모레라의 인터뷰 내용이다. ”단순히 가난이 두려운 게 아니라 가난이 주는 수치스러운 삶을 주인공들이 두려워했어요.“ 로코코 시대를 다룬 유튜브 채널이나 자료들을 통해 종합해보면 이 시대의 프랑스 사회는 전반적으로 환락에 몰두한 퇴폐적인 사회였다. 소설 속의 B씨와 늙은 부호 G.M과 그 아들 G.M 주니어는 겉으로는 도덕적인 척 하면서 사실은 위선적인 상류층을, 마농의 오빠 레스코는 가난을 핑계 삼아 누이동생이나 딸의 아름다움을 파는 인면수심의 가족들을, 주인공 마농은 그런 일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계층의 여인을 풍자한 것이다. 이러한 타락과 퇴폐는 계속 누적이 되어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수많은 마농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질적인 풍요를 선택했다. 그러나 부유층이 아닌 계층에서 태어나 코르티잔이 되어 최고의 권력을 누린 마담 퐁파두르의 인생이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이용당하다가 버려졌다. 부셰의 초상화 한 점으로 루이 15세의 눈에 들어가 인생이 한순간에 바뀐 소녀 마리 루이즈 오뮈르피도 결국 버려졌다.

프랑수아 부셰, <엎드려 있는 소녀>,  초상화 한 점으로 인생이 바뀐 소녀 마리 루이즈 오뮈르피


소설 속 주인공 마농도 버림받고 프랑스의 식민지인 미국 뉴올리언스로 추방당한다. 그리고 나서야 마농은 데 그리외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는다. ”반성하고 있어요. 나는 당신이 내게 준 놀라운 사랑을 결코 받을 자격이 없음을 잘 알아요. 당신에게 많은 슬픔을 안겼어요.“ 소설에서 이 부분을 읽고 나서야 얼음장같이 굳었던 내 마음이 조금 풀렸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글을 쓰면서 소설 속 마농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그녀도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저자인 아베 프레보는 카톨릭 사제로서 러브 스토리를 쓰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었는지, 작가의 말에서 "거기서 이야기되는 사건 하나하나가 깨달음의 과정이고 경험을 대체하는 교훈이다...엄격한 독자는 이 나이에 운명과 사랑의 연애사건을 쓰려고 붓을 다시 드는 나를 보고서 아마도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좀 전에 제안한 성찰이 건전하다면, 그것은 나를 정당화해줄 것이다."라고 씀으로써 미리 자기 자신을 보호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주인공들의 (연애) 심리 묘사가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격정적이고도 휘몰아치는 사랑 이야기로 당대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지금 보아도 ‘문학으로 읽는 심리학‘ 또는 ’통속적인 연애 소설‘로 읽기에 좋다. 저자의 의도 그대로 교훈적인 책으로 읽어도 되고 또는 소설 속 시대적 배경까지 함께 읽는 문화사 그리고 발레 작품의 원작이기도 하니 역시 고전인가 보다.     


원작의 시공간을 무대 예술로 옮겨 담기에는 많은 제한이 따른다. 그래서 맥밀란은 원작의 액자식 구성을 빼고, 소설 속에서 마농이 보인 반복적인 패턴들을 대부분 생략했다. 내용이 단순해진 발레 작품은 대신에 마스네의 음악과 함께 인물의 개성과 감정을 담아낸 무용수들의 몰입감 높은 춤으로 감동을 증폭시킨다. 소설 속에서는 18세기의 빌런으로 보였던 마농이 맥밀란의 작품 속에서는 순수한 사랑을 꿈꾸면서도 물질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다소 감정선이 섬세하면서도 팜므파탈의 이미지도 동시에 지닌 매력적인 캐릭터로 창조되었다. 소설 속에서는 집착으로 보였던 데 그리외의 사랑도 발레 작품 속에서는 감성적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맥밀란은 원작에서 인간 사회의 본질,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작품에 담아냈다. 발레 <마농>을 보면 볼수록 맥밀란이 음악 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상과 문화를 매우 깊게 연구했다는 생각이 든다.





<춘희>     

<마농 레스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진 소설 <춘희>. 소설의 소재,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액자식 내용 전개, 수미상관의 구조, 비극적인 결말이 똑닮았다. 소설 속 주인공 아르망이 마르그리트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변화된 환경으로 인해 도박을 하는 등 물들어 가는 모습도 데 그리외를 연상시킨다. 또 아르망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후원자로부터 돈을 받아내는 마르그리트의 모습은 충분히 마농을 떠올리게 하는 등 소설 곳곳에서 <마농 레스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하찮은 일은 나만으로 됐어요. 하지만 이익은 둘이 나누어요.“ 마르그리트는 이렇게 말하고 미소를 띠었습니다...이익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데 그리외와 공모하여, 비씨의 돈을 써 버리는 마농 레스코의 모습을 생각한 것입니다.”(p. 167~168)

“그때부터 나는 여자의 생활을 변경시킬 수 없어서, 자신의 생활 쪽을 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마르그리트는 마음이 변하기 쉬운 성품으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향락을 좇으면서 돈에 대한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여자였습니다.”(p. 198~199)     


그러나 결코 표절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게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작가가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아베 프레보는 마농을 18세기의 빌런으로 적나라하게 묘사를 했다면 뒤마 피스는 마르그리트를 애잔하게 그려냈다. 안좋은 유형의 연애 심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 아베 프레보와는 달리 뒤마 피스는 여인의 심리를 매우 잘 캐치하고 여자의 마음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작가이다. 소설 <춘희>를 읽으면서 느껴진 저자의 시선은 매우 따스했다. 주인공 마르그리트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서 로트렉이 자신의 그림 모델들을 애잔하게 바라본 그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앙리 드 툴르즈 로트렉, <물랭가의 살롱>
에드가 드가,  <무대 위의 무희>, 사회적 신분이 낮았던 19세기의 발레리나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남성들의 코르티잔이었다.


주인공 마르그리트는 여러모로 마농보다 훨씬 더 진화된 캐릭터이다. 다소 천박하게 보였던 마농과는 달리 마르그리트는 마치 귀부인과 같은 고고한 기품마저 서려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의 코르티잔들은 샬롱 문화를 주도했던 지성인들이었다. 따라서 마르그리트는 로트렉의 그림 속 모델들과도 처지가 매우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코르티잔들은 거의 귀족, 지식인들하고만 어울렸기 때문에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평범한 청년인 아르망이 마르그리트를 만나기 위해 코르티잔들을 잘 알고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는다.     


뒤마 피스는 마르그리트를 통해 당시 코르티잔들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들을 여러 각도로 묘사를 했다. 귀족 여인들에게는 자유롭게 사는 그녀들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또한 낮은 계층의 여인들은 화려하게 사는 그녀들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귀족이나 부유층 남성들에게는 욕망의 대상이었고 사회적으로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뒤마 피스의 아버지인 알렉상드르 뒤마,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저자
소설 <춘희>의 저자 뒤마 피스


마농처럼 단순하지가 않은 마르그리트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캐릭터이다. 첫 등장부터 기품있고 품위있어 보였던 그녀가 아르망과의 첫 대면에서는 매우 짖궂게 행동한다. 그 동안에 부유층 남성들한테서 받았던 부당함과 서러움이 많았는지 아무 잘못 없는 아르망에게 수동 공격을 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 뒤부터 이 소설 읽기는 마르그리트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앓고 있는 폐결핵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오히려 극장 관람을 자주 하고 각종 파티 등의 향락에 몰두한다. 그러나 무절제한 그녀의 생활은 그녀의 지병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러던 찰나에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순수한 사랑이 다가온다. 아르망의 순수한 사랑에 어느 새 마르그리트도 마음을 연다. 그리고 둘은 그렇게 서로를 순수하게 마주한다. 서로에게 진심이었던 그들은 서로를 점점 성장시킨다. (이 점에서 ’마농과 데 그리외‘와는 다르게 내 마음이 활짝 열렸다.)     


“만일 당신에게 사랑을 한 경험이 있으시면, 그리고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었으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살아가려는 상대방을 이 세상에서 떼어놓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셨을 것입니다.”(p.206), “화류계 여성의 티는 조금씩 사라져갔습니다. 내 옆에 있는 것은 젊고, 아름답고, 서로가 사랑하고 있는 마르그리트라고 부르는 여인입니다.”(p.207)     

“마르그리트는 내 목에 두 팔을 감고 조그만 소리로 소곤거렸습니다. ”나,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자, 이 자리의 모양을 공작에게 이야기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는 그분에게 용무가 없다고 그렇게 말해 주세요.“(p.218)     


소설 속에서 마르그리트의 반전 매력은 계속 된다.

”허약한 체질로 그녀는 무슨 일에나 쉽게 감동했습니다. 지난날의 습관과 더불어 친구들과도 손을 끊고, 지난날의 낭비와 더불어 말씨도 고쳤습니다.“, ”이 여자는 하찮은 일에도 어린아이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날은 마치 열 살 정도의 여자아이처럼 나비나 잠자리를 쫓아가며 정원을 뛰어다니는 때도 있었습니다.“, ”마르그리트가 <마농 레스코>를 되풀이해서 읽은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습니다...그녀는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가 사랑을 해도 모두 마농과 같을 수는 없다고.“(p.219~220)     


사치스러웠던 과거를 청산한 마르그리트는 그동안에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각종 보석과 캐시미어 숄, 마차를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쓴다. ”그런 것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요.“(p.235) 그리고 마르그리트는 이 순수한 사랑을 간절히 지키고 싶어한다. ”아르망, 제발 할 수 없어 하던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가게는 하지 말아주세요. 네?“(p.238)     


그러나 사회적인 시선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르그리트에게 예의를 갖추면서도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아르망의 아버지는 그만 아들과 헤어질 것을 정중하게 당부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통찰력이 담긴 당부에서 마르그리트는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느끼는데, 이 부분에서 마르그리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마르그리트의 실제 모델인 마리 뒤프레시가 실제로는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설 속에 창조된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정말 아름다운 캐릭터이다. 작가의 섬세한 필치에서 피어난 마르그리트는 비록 코르티잔이어도 마음만은 순수하다는 환상을 어느 정도 심어놓는 인물이기도 하다. 뒤마 피스는 소설을 통해 코르티잔을 향한 사회적인 편견을 묘사했다. <마농 레스코>와 <춘희>를 읽은 후기를 쓰면서 주인공인 그녀들을 떠올려 보았다. 뛰어난 미모로 환승 연애를 하면서 눈앞의 화려함을 쫓았던 마농, 한때 같은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마르그리트. 자유로워 보였지만 결국 사회적인 잣대는 그녀들을 재단하면서 사회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뒤마 피스는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말하고자 한 것인데, 21세기에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소설의 실제 모델인 마리 뒤프레시, 소설은 어느 정도 작가 개인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는 자신의 발레 작품에서도 액자식 내용 전개와 수미상관의 구조로 만들었는데, 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에서는 1인칭 관찰자가 죽은 마르그리트의 집에 찾아가 <마농 레스코>를 경매 낙찰을 받는다. 이후 아르망이 1인칭 관찰자의 집에 찾아와 그 책을 자신에게 양도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발레 작품에서는 아르망이 죽은 마르그리트의 집에 찾아가 <마농 레스코>를 발견하면서 회상에 빠져든다. 또 소설에서는 아르망이 1인칭 관찰자에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액자식 내용 전개하는 반면 발레 작품에서는 <마농 레스코>가 작품 전반에 나오면서 그들의 심리상태를 묘사하고 미래를 암시하는 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발레 <까멜리아 레이디>에서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 '라르고'가 두 주인공들의 사랑의 온도와 관계의 변화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듯이 소설 속에서는 <마농 레스코>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발레 작품 속에서 쇼팽의 선율과 함께 사랑의 격랑을 타는 세 번의 파드 되인 ”퍼플 파드 되“, ”화이트 파드 되“, ”블랙 파드 되“로 표현된 색채를 책 속에서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주인공들의 첫 대면은 소설과 발레 작품의 묘사가 많이 달라서 ’퍼플 파드 되‘는 안무가의 창작력이 들어갔지만 다른 두 파드 되는 소설속 묘사를 안무가가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마르그리트는 하얀 옷을 입고 내 팔에 기대어 별이 반짝이는 밤, 전날 밤의 속삭임을 되풀이했습니다.“(p.207), ”마르그리트가 들어왔습니다. 옷은 검정 일색으로 베일을 쓰고 있었습니다.“(p. 295) 차이점은 발레 작품 속에서는 복잡하게 얽힌 둘의 감정이 동시에 폭팔하는 ’블랙 파드 되‘와는 달리 소설 속에서는 아르망 혼자만 폭팔한다. 이미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인데, 이런 점에서 마르그리트가 조금 더 성숙하게 보인다.     

발레 <까멜리아 레이디> 중에서 '퍼플 파드 되', 둘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발레 <까멜리아 레이디> 중에서 '화이트 파드 되', 무르익은 사랑을 묘사한 파드 되로 정말 아름답다.
발레 <까멜리아 레이디> 중에서 '블랙 파드 되', 뒤엉켜 있던 두 사람의 복잡한 감정이 폭팔하는 장면으로 이 작품의 백미이다.


처음에는 마르그리트라는 인물에 흥미가 생기면서 그녀를 알아가는 재미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 어느새 그녀의 매력에 푹 빠졌고,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그녀에게 배운 점도 있다. 비록 연애 소설이어도 단순히 통속 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정말 좋은 소설이다. 누구나 다 진심을 이야기하지만 가짜 진심이 대부분인 인간 세계에서 주인공들이 서로를 순수하게 마주보았던 사랑 이야기는 매우 가치가 있다. 또한 프랑스가 근대화 이후 변화된 사회 속에서 19세기 방식으로 또 다르게  타락했던 프랑스의 시대상이 전반적으로 이 책 속에 다 담겨있다. 원작 속의 아름다운 마르그리트는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알폰소 무하의 아름다운 연극 포스터로,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비올레타로, 쇼팽의 마음을 파고드는 선율에서, 리스트의 격정적인 피아노 소나타에서, 여기에서 파생된 영화에서도 여러 모습으로 창조된 마르그리트의 모습은 환생한 모습마다 모두 아름다운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알폰소 무하, <동백꽃 여인>, 모델은 유명한 연극배우 사라 베르나르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프레데릭 애쉬턴의 발레 작품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소설 <춘희>,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모티프를 얻어 제작한 영화 <물랑루즈>
매춘부와 사업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귀여운 여인>, 영화 속에서 에드워드가 비비안을 데리고 오페라 극장에 간다. 영화 속 오페라는 바로 <라 트라비아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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