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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발란신은 미국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발란신의 발레 수업

by 아트 서연

발란신의 발레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네오 클래식 발레"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스타일도 전혀 다른 발레를 미국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러시아 발레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물론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디테일이 러시아 발레와 상당히 많이 다르다.


이번에 미국 발레에 호기심이 생기면서 발란신이 발레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미국 아이들이 발레 클래스를 받는 장면, 유튜브 채널 "Ballet Reign"과 제니퍼 호먼스의 책을 참고, 미국 발레단에서 조금씩만 공개하는 짧은 영상물들과 발란신에게 직접 발레를 배웠던 무용수들의 인터뷰 내용들을 꼼꼼하게 메모해가며 체크했다.


"발레"의 '발"자도 몰랐던 미국인들에게 발란신은 무엇을 가르쳤을까? 그는 미국에 발레를 뿌리내리면서 발레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그의 가르침은 러시아 발레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을까?


발란신은 어릴 때부터 러시아 발레를 아주 엄격한 방식으로 배웠다. 굉장히 강압적인 방식으로 발레를 배웠다고 훗날 회고한 발란신은 미국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무용수들을 훈련시켰다. 당시 근육이 타 들어갈 것만 같았다고 호소했던 미국 무용수들은 발란신에게 양가 감정을 느꼈다. 애증의 관계임과 동시에 발란신에게 칭찬이나 관심을 받는 날에는 마치 부모에게 사랑받는 자식과 같은 마음이 되었다. 어느 한 무용수는 "발란신의 눈에 띄기 위해 무용수들이 예쁜 옷을 입고 클래스에 참석하거나 머리를 예쁘게 묶었어요."라고 회고했다. 역할을 두고 무용수들끼리 경쟁하기도 했다.


발란신의 가르침을 후배 무용수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발란신의 제자들의 인터뷰 내용들을 보면 존경심을 넘어서서 숭배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발 뒤꿈치나 발가락이 아닌 발 앞꿈치에 체중을 실어야 한다.", "발레는 땅에서 벗어난 예술이라고 말씀하셨다.", "발끝으로 선 발레리나는 나부끼는 빛과 같다.","발란신은 공중에 떠있는 법을 가르치셨다.", "(발란신이 시연할때)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마법 같았다." 등등의 인터뷰 내용들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했다. 1960년대 타임지의 한 기자가 뉴욕 시티 발레단의 무용수들을 취재했을 때 무용수들이 다 하나같이 발란신이 예수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미심쩍어했다고 하는데, 나도 그 기자와 같은 마음이 들었다.


현재까지 살아있는 발란신의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숭배하면서 위에 적은 것과 같이 말했는데, 원래 발레가 천상에 조금이라도 닿으려는 예술이기 때문에 중력이 안 느껴지게 춤을 춰야 하는 무용이다. 그리고 토슈즈를 신으면 발등을 밀어서 서야 하기 때문에 발 앞꿈치에 체중이 저절로 실어진다. 천슈즈를 신고 데미 포인으로 서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 중심을 잡게 된다. 이 때 발앞꿈치에 체중을 싣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코어 근력과 무릎과 발목 사이의 근육이다. 왜 저렇게까지 발란신을 숭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자들이 증언한 내용에서 발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미국인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기 위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려고 했던 발란신의 고뇌가 느껴졌다.


발란신은 일일이 무용수들을 가르쳤다. 발란신의 발레 클래스는 제조 공장과도 같았고, 매우 엄격했다. 발란신은 자신의 발레 클래스에서 무용수들에게 무한 반복을 시켰다. 발레를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무한 반복을 시켜서 아예 리듬을 몸에 새기고, 춤을 먹어버리도록 훈련을 시켰다.


당시 미국 무용수들은 "안돼. 다시.", "더", "뭐 때문에 힘을 아끼려는 거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춰.", "연기하지 마. 그냥 스텝 밟아."와 같이 발란신의 가르침을 따라가기에도 벅찼는데, 그의 연출 지시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네오 클래식 발레의 창시자답게 발란신은 무용수들에게 추상적인 표현으로 연출 지시를 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안무를 설명했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라고 다시 한 번 더 물어봐야 했다. 발란신의 연출 지시를 완벽하게 다 알아들은 무용수는 오직 발레리나 수잔 패럴 뿐이었다.


"직접 가르친 무용수들도 눈을 떼면 금세 동작을 틀려버려요. 내가 없는 곳에는 내 발레도 없어요."라고 말한 발란신은 자기 자식을 지켜보듯 무용수들을 지켜보았다. 물론 어떤 무용수들은 하나 하나 일일이 자세와 동작을 잡아주는가 하면 어떤 무용수들은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발란신의 후예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럼에도 발란신은 무용수들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고 한다.


발란신의 발레 클래스는 월요일에는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화요일부터 서서히 한 두명씩 떨어져 나가면서 금요일에는 발란신의 수업을 좋아하는 소수 정예만 남았다. 이 소수 정예가 발란신의 눈에 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발란신에게 불만을 품었던 무용수들도 이내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다시 발란신의 발레 클래스를 받기 시작했다.


발란신의 발레 클래스는 곧 작품 안무이기도 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춤의 세계를 발레 클래스를 통해 무용수들에게 최대한 주입시키면서 펼쳤다. 그가 만든 춤은 새로운 움직임이었고, 그의 발레 클래스는 안무 실험실이었다.


발란신은 미국 무용수들에게 "발레란 땅에서 벗어난 예술이다."라고 설명했다. "나방 날아다니는 거 본 적 있지?", 발을 착지하는 동작에서도 마치 귀중품을 내려놓듯 발끝을 살며시 놓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스텝을 걸을 때에도 발바닥 전체가 아닌 마치 발끝에 오렌지 하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텝을 밢으라고 하기도 하고, "소지품을 건네주듯이", "샴페인 마개가 터지듯이" 등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나 음식을 형상화하면서 무용수들에게 자신의 춤을 이해시켰다.


"가지런하지 않고 삐뚤삐뚤한 치아가 좋다. 그게 더 재미있다."


발란신에게 무용수들의 키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무용수들의 키 차이를 안무에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발란신에게는 무용수들의 키 등의 피지컬보다 본질이 더 중요했다. 그 본질은 바로 '음악"이었다.


발란신이 가르치고자 했던 무용수의 역할은 몸으로 음악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음악을 이해하고 춤추는 법을 알아야 발레라는 예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겼다. 발란신은 음악이 춤의 기본이기에 무용수들은 몸으로 움직이는 음악을 표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미국의 무용수들은 발란신에게 순간순간 음악 그 자체를 표현할 것을, 무대위에서 스텝을 밟을 때조차도 시를 쓰고, 음악을 추듯이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음악이 있고, 춤이 있고, 스텝이 있고, 무용수가 있는 거죠."

"춤에서 중요한 건 사람이에요. 안무가는 춤 속에서 존재하지 않아요. 춤을 만들 뿐이죠. 발레의 주인은 지금 그 춤을 추는 무용수에요. 당신 앞에서 춤추는 그 무용수요."

- 조지 발란신 -


**발란신 할아버지께 보내는 연말 메세지**

할아버지가 남긴 명언 중에서요.

"여러 무용수들을 가르치다보면 다들 훌륭하고 아름답긴 하지만 결국 한 사람에게만 시선이 가게 돼.",

"왜 한 명만 보이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저도 그래요.

작품을 보다보면 다들 아름다운 무용수들인데도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단 한 명의 무용수가 있더라구요.


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음악이 있고 춤이 있고 스텝이 있고 무용수가 있는 거죠."

"춤에서 중요한 건 사람이에요. 안무가는 춤 속에 존재하지 않아요. 춤을 만들 뿐이죠. 발레의 주인은 지금 그 춤을 추는 무용수에요. 당신 앞에서 춤추는 무용수요."


안무가는 단지 춤을 만들 뿐이라고 말씀하셨던 할아버지는 거대한 산이 되어 지금도 수많은 미국 발레인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고 무용수들 마음 속에 살아숨쉬고 있던데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할아버지가 만드신 춤들이 많이 궁금해졌어요.


또한 그 춤을 추는 무용수가 발레의 주인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 춤은 피지컬로 추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추고 있는 무용수가 발레의 주인이라고 저는 그렇게 할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요즘 유난히 할아버지의 춤을 잘 추고 있는 발레리나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참고 문헌

<아폴로의 천사들: 발레의 역사>, 제니퍼 호먼스 지음


참고 영상물

<발란신의 발레 클래스>

유튜브 채널 "Ballet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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