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나도 그 날의 공연에 대한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해도 도무지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그 날 딸아이의 친구엄마와 딸의 친구와 함께 가서 맛난 점심도 먹고, 사진도 찍고, 문훈숙 단장님의 멋진 발레 해설도 들었는데 정작 키트리와 바질 역을 맡은 무용수들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고,다른 무용수들을 비롯한 공연에 대한 인상과 기억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마치 그 날의 공연에 관한 기억들만 가위로 싹둑 자른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딸아이의 발레 데이트 신청을 한 번 더 튕겼다.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공연하면 엄마는 안가."
아주 오래전에 너무 먼 곳에 위치한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딸아이가 말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해."
어쩔수 없이 나는 딸아이랑 <돈키호테>를 관람하기로 했다.
그리고 딸과 함께 <돈키호테> 공연 날짜와 캐스팅을 보면서 강미선 발레리나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작품의 첫공연하는 금요일에 관람하기로 결정했다.
티켓팅
딸이 말했다. "엄마, 티켓팅 하려는 데 어느 좌석이 제일 좋을까?"
나는 B블럭의 6~8열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잠시 뒤 딸아이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엄마, 티켓팅 하려는데 B블럭이 순식간에 매진되어서 C블럭으로 예매했어."
나는 "이게 무슨 일이지?"하고 했다가 이내 생각이 났다.
강미선 발레리나가 <미리내길>로 브누아 드 라당스를 수상해 언론에 연일 오르내렸던 것을 말이다.
내 마음 속의 발레리나
발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던 시절부터 나는 발레 애호가였다.
예쁜 튀튀를 입고서 발끝으로 천상의 춤을 추는 발레리나들의 백조같은 모습은 언제나 내게 로망이었다.
시간을 전혀 낼 수 없어서 어쩔 수가 없는 경우에만 제외하고는 되도록 발레 공연을 많이 봤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취미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발레 공연을 직관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별로 없다.
발레 실력은 늘지 않는데도, 내가 직접 하는 발레의 재미에 빠져서 공연을 관람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줄어든 게 원인이었다. 아주 오래전보다는 발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데도 영상물로 감상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발레 공연관람은 거의 하지 않았으니 참 아이러니하긴 하다.
강미선 발레리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발레리나이다.
발레에 대해서 1도 몰랐던 그 시절 그녀가 타티아나로 나왔던 <오네긴>을 직관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그녀는 타티아나 그 자체였다. 순수한 사랑을 꿈꾸었던 소녀가 사랑의 거절에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그토록 사랑했지만 어긋나기만 했던 사랑, 그 후 어긋났던 사랑이 다가왔으나 현재를 선택하는 가슴 아픈 그녀의 절절한 연기를 보고 그 날 나는 펑펑 울었다. 그 후 나는 강미선이라는 이름의 발레리나를 꼭꼭 기억해두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러 러시아의 살아있는 전설의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유니버설 발레단과 협연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 무렵 나는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거미줄같은 병원 스케줄과 체력이 안 되어 자하로바의 팬인데도 관람을 할 수가 없었다. 공연이 끝난 후 언론에서 니키아 역을 맡은 자하로바와 유니버설 발레단의 협연이 아주 성공적이었다며 대서 특필했다.
자하로바의 상대역으로는 내 기억 속의 발레리나 강미선이 출연했었단다. 감자티 역을 맡았던 강미선 발레리나의 춤과 찰떡같은 연기력은 그 공연 이후 발레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얻으며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관람을 못했지만 정말 아까운 공연을 놓친 게 후회가 되긴 했다. 사실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었다.
그녀는 원래 춤을 잘 췄다
연초에 강미선 발레리나가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의 수상소식에 내 일처럼 기뻐하면서도 언론의 보도 내용에는 다소 실망했다.
"대기만성형 발레리나."
이 문구에 대해서 한참 생각했다. 발레리나로서의 그 동안의 인내심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일궈낸 성과를 두고 비유를 한 거라면 그다지 틀린 비유는 아니다.
그러나 무용은 신체로 표현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대기만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강미선 발레리나는 원래 춤을 잘 추는 발레리나였다. 그리고 발레 애호가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녀의 춤 솜씨와 연기력이 일품이라는 것을...
그녀의 춤과 연기로 녹여낸 키트리
어제 유니버설 발레단의 <돈키호테>는 실로 몇 년만에 관람하는 발레 공연이었다. 2년전 연말에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미선 발레리나의 키트리는 러블리한 우아함에 여우 한 스푼이었다.
캐스터네츠 베리에이션을 비롯한 키트리의 춤선은 전반적으로 생기발랄함에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면서 바질과는 여우같은 밀당을 했다.
강미선 발레리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근육이 너무 잘 붙는 체질이어서..."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선 리나의 근육은 정말 멋지다. 근육이 멋지게 잘 붙는 체질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롱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출산하고도 얼마 뒤에 복귀를 해서 발레 클레스로 몸을 단련하고 작품 연습에 매진하여 세계 무용가 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타고난 춤솜씨와 연기력을 받쳐주는 튼튼한 기초 체력 덕분이다.
이처럼 근력이 정말 좋기 때문에 어제의 공연에서도 그녀가 보여준 모든 동작들이 너무 멋졌다.
또한 푸에테를 돌때에도 중심축이 탄탄해 매우 안정적으로 회전을 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갓미선!"하고 감탄을 했다. 가끔 러시아 발레리나들의 경우 너무 크고 말라서 푸에테를 돌 때에 중심축이 흔들리는 경우를 봤다.
다만 미선 리나가 푸에테를 돌 때에 관객들이 리듬에 맞춰 박수를 크게 하는 행동은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쉬웠다. 무용수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와 근력을 끌어모아 풀업 상태로 서른 두 바퀴의 회전을 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용수의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용수가 음악을 들으면서 박자와 리듬에 맞춰 회전을 할 수 있도록 관객들은 배려를 해야 한다.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는 발레리나가 푸에테를 다 돌고 나서 포즈로 마무리 할 때에 해도 충분하다.
미선 리나의 캐스터네츠 베리에이션이 생각보다 우아했다. 아마도 미선리나의 성숙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연출로 방향 설정을 한 듯 하다. 그래도 이 부분에서 동작에 조금 더 화끈한 악센트를 보여주는 연출 지시를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셈여림을 하면서 피케턴을 도는 모습에서 미선 리나의 리듬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바질과는 극 중 연애인지, 실제 부부의 꽁냥꽁냥인지 모를 연기를 펼쳤고 바질은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연애를 하는 연인답게 키트리를 정말 가볍게 들어올렸다. 바질 역을 맡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는 역시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 발레를 배운 무용수다운 체형이었다. 유연성도 정말 좋아서 랑베르세를 돌 때에 몸선이 너무 예쁘고 우아했다.
쌀쌀했던 가을 날씨에 열기를 더해준 스페인의 화끈한 감성
1막에서 마을 처녀들이 폴드브라에 악센트를 주면서 강렬하고도 매혹적인 춤을 추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점점 스페인의 감성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마을 청년들이 리드미컬하게 탬버린을 흔들면서 보여준 흥이 넘치는 춤은 공연장의 열기를 달아오르게 했고스페인 민속춤에서 차용한 현란한 발스텝과 투우사들의 화끈한 춤은 1막의 백미였다.
2막에서 큐피드의 장난끼 넘치는 손털기 동작과 공기처럼 가벼운 브레브레 스텝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또 아름다운 클래식 튀튀를 입은 숲 속 요정들이 보여준 '돔베 파드브레 글리사드 제떼', '페르메'와 '아쌈블레', '제떼 앙투르낭'과 같은 발레 동작들은 요정들의 신비로움과 환상적인 모습들을 더해주었다.
3막에서는 강렬한 판당고가 인상적이었고
주인공 키트리와 바질의 '결혼식 그랑 파 드 되'는 그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였다. 깊어가는 가을날 마음 따뜻해지는 열기와 낭만으로 끼와 흥이 넘쳤던 공연의 감동과 여운은 한동안 오래갈 듯 하다.
언제나 열정이 넘치시는 문훈숙 단장님의 해설과 시연해주신 발레 동작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군무와 의상은 유니버설 발레단이 최고다!
공연 전에 유니버설 발레단이 인스타 계정에 의상 제작 과정을 영상으로 담은 피드를 올렸는데, 발레 애호가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너무나 좋은 영상이었다.
무용수들의 신체조건도 국내 발레단들 중에서 가장 좋아서 유럽의 어느 발레단에도 빠지지 않을만큼 체급이 다 하나같이 좋았다.
한국 발레가 더 발전하려면 꼭 필요한 것! 이것!!
다만 가장 아쉬웠던 점은 오케스트라 반주였다. 현악기 소리도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는데, 관악기 소리는 더 거슬렸다. 극 초반에 음악이 너무 처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시작부터 내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다행히 극이 전개됨에 따라 음악의 분위기도 점점 고조되긴 했으나 가끔씩 무용수들의 스텝과 동작을 못 따라가는 연주가 내 눈에 포착이 되었다.
발레단의 전용 오케스트라단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국 발레가 더 성장하려면 러시아, 영국, 프랑스처럼 전용 극장과 오케스트라단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유일하게 유니버설 발레단이 전용극장인 유니버설 아트센터를 보유하고 있으나 너무 멀다.)
발레 음악이 클래식에 분류되지만 발레 음악은 '무용 음악'이다. 무용을 위한 음악이기 때문에 무용을 위한 연주를 해야 한다. 무용수들과 함께 호흡하고 움직임을 읽어내는 지휘자와 악단이 국내에는 없는 게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