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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by 아트 서연

여러차례 영화로 제작되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영화계 뿐만 아니라 크리스티안 스퍽, 존 노이마이어,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등의 발레 안무가들도 매료된 작품.

각 분야의 연출가들이 이토록 매혹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벽돌책 깨기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에서 도덕 교과서, 국민윤리같은 인물로 나오는 안나의 남편 카레닌이 얼마나 융통성이 없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서로간에 매우 촘촘하게 얽혀있는 안나와 카레닌 그리고 브론스키, 오블론스키와 돌리, 레빈과 키티 이 세 그룹이 겪는 사랑과 전쟁 스토리가 주된 것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사실은 매우 방대한 소설이다. 톨스토이의 지식세계는 한계가 없고, 정신세계는 매우 넓고, 내면세계는 깊은 바다와 같으며 예술에 대한 감각 역시 조예가 깊다. 게다가 소설 속에서 상류층 여인들의 장신구나 의상, 각 장면들의 묘사는 정말 세밀한 그림 같았고, 각 캐릭터들의 심리묘사는 너무나도 섬세해서 읽을 때마다 각각의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탐험하고 나오는 것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시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 문장들이 핵심 키워드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문장들을 중심으로 복잡하고 방대한 소설을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읽어나갔다. 영화와 발레 작품에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알게 되면서 카레닌과 브론스키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고, 안나라는 캐릭터 자체에 대해 고민을 했으며 키티의 매력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이 세 그룹 중에서 카레닌과 안나는 이상주의자 커플이라고 말하고 싶다. 카레닌은 결혼생활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고, 안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카레닌은 아내인 안나마저도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맞게 교화의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강렬한 빨강, 파랑, 노랑과 같은 원색의 감정을 지닌 안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숨막혀 하다가 브론스키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그동안 그토록 갈망해왔던 낭만적인 사랑에 빠진 안나는 남편을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인물로 보면서 협오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자신은 진정성을 추구한다면서 정작 남편의 전정성은 못보고 남편에게 브론스키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깊은 생채기를 내는가 하면 정작 브론스키를 만날 때는 남편과 이혼할 수가 없다며 브론스키를 혼란에 빠뜨리는 등 양가감정에 빠지면서 본인이야말로 진정성을 추구하지 않는 자기모순을 보인다.


이 책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들이 안나와 깊이 연결되었던 카레닌과 브론스키이다. 사실 카레닌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인물이기는 하다. 부부가 종교적인 신념, 가치관 등이 맞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별 거 아닌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카레닌은 몰랐다. 인간관계에서 스몰토크가 윤활유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결혼생활 역시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것, 즉 어떠한 높은 정신적인 가치도 중요하지만 생선살 발라주고 생선가시 골라주는 것과 같은 소소한 일상들이 부부 사이를 유지시켜주는 것을 카레닌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카레닌의 성장과정을 보면 그러한 감정표현을 배울 수가 없었다. 결국 안나의 외도를 알게 된 카레닌은 그렇게 목석같았던 감정이 흔들리면서 평소와는 다르게 감정을 안나에게 표현하지만 그 감정들이 안나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레빈과 키티 커플은 무척 대조적이다. 톨스토이의 아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레빈은 당신이군요."라고 말한 일화가 유명할 정도로 소설 속 레빈은 톨스토이의 페르소나로 널리 알려져있다. 귀족인데도 귀족답지 않게 노동의 가치를 신성시하는 레빈은 시골생활을 하면서 남들처럼 가정을 이루기를 꿈꾼다. 그러나 키티가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뒤늦게 다시 시작된 인연은 수많은 경험과 사건을 겪으면서 둘의 사랑이 더욱 견고해진다. 레빈은 자신의 환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깨는 키티의 모습에 당황해하지만 그런 키티의 모습에서 또다른 매력을 느낀다 .무척 철학적인 인물이기도 한 레빈 역시 안나 못지않게 정신세계가 복잡한 인물이지만 일상의 소소함에서 기쁨을 얻는 키티의 모습이 레빈의 복잡한 정신세계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레빈과 키티의 가정 생활에 실제 톨스토이의 결혼생활을 녹여낸 것처럼 무척 현실적이고 생동감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제목이 <안나 카레니나>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레빈이고, 톨스토이가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레빈과 키티의 가정생활에 있다.


소설에 나오는 19세기 러시아의 사회적 배경,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이념과 사상, 오늘날에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해석되는 작품해설 등의 군살(?)을 제거했더니 이 책이 결혼생활학 개론, 커플백서의 고전처럼 보였다.


가장 훈훈한 커플은 역시 레빈과 키티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붙잡으며 강렬한 인생을 산 안나와는 달리 키티는 지극히 '지금, 여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캐릭터이다. 내면세계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 캐릭터이지만 의식수준은 상당히 높다. 자신이 짝사랑했던 브론스키가 안나와 사랑에 빠진 뒤 사랑의 가슴앓이를 하면서 크게 아프지만 그 속에서도 키티는 성숙해간다. 그러니까 1권은 키티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뒤늦게 진짜 인연을 찾은 키티는 결혼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주부가 되어간다. 소설을 잘 읽어보면 키티가 나름 정치질(?)도 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빈을 거의 아들처럼 돌보고 집안살림을 도맡아 해왔던 할멈이 마님이 새로 들어왔다고 해서 손쉽게 권한을 내어줄리는 없지만 키티가 주도권 싸움에서 야무지게 이기고 오히려 할멈의 사랑도 얻는다. 또 열정적인 사랑의 결과인 결혼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키티는 몸소 보여준다. 레빈을 알뜰살뜰하게 챙기는 키티는 레빈과도 잘 싸운다.(?)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싸울수도 있는 것이니 싸울때는 잘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톨스토이가 친절하게 다 알려주고 있다. 키티와 레빈의 다툼은 안나와 브론스키처럼 상대방의 감정을 할퀴거나 이겨먹으려는 싸움이 아닌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는 안전한 다툼이다. 안나와 카레닌처럼 안 싸우면서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위한 키티와 레빈의 투닥투닥거림은 어떻게 싸우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키티가 평소에 마일리지를 워낙 잘 쌓은 덕에 가끔씩 레빈에게 왈왈왈해도 레빈이 수긍하는 부분들이 있기도 하다.


안나라는 캐릭터에 대해 나름 고민을 안고 책을 읽으면서 안나와 브론스키에 대해 윤리적인 재단을 하지 않기로 했다. 1부에서 브론스키가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일종의 훈장처럼 생각하는 부분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브론스키는 안나 카레니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카레닌도 참 성실했는데, 브론스키 역시 정말 성실한 남자이다. 단지 안나가 심리적으로까지 지배하려고 하면서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니까 브론스키는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면서 자신의 행복은 겨우 모래 한 알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여기서 자리 잡고 일하는 게 행복하고 만족스럽습니다. 행복을 위해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일을 사랑합니다. 그건 다른 더 좋은 걸 가지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3권, p.138)


사랑의 형태가 변화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주어지는 역할의 변화도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키티와는 다르게 안나는 오직 '강렬한 사랑'에만 매달린다. 남편에게는 이 말하고, 정작 브론스키에게는 저 말을 하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료자는 예쁘다 하면서 정작 아들을 떼어놓고 브론스키와 밀월여행을 떠나버리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브론스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는 정이 안간다고 말하는 안나의 모습에 솔직히 기 빨렸다. 똑같이 잘못을 저질러도 남자인 오블론스키, 브론스키는 면죄부를 받고, 안나는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이 찍혀 사교계에 제약을 받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안나가 더욱 사랑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는 페미니즘의 시각에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페미니즘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안나 자체가 정신세계가 복잡한 사람인 것이다.혹시 나의 편협한 시각으로 안나를 판단하는가 싶어서 당시 러시아 사회를 생각해보며 안나의 처지를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같은 시대 조선의 여인들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보여서 안나의 처지를 공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안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걱정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스스로가 자기파괴를 한 것이다.


이쯤되면 안나가 브론스키를 진정으로 사랑했는가에 관해 의구심이 생긴다. 어린 나이에도 안주인 역할을 똑부러지게 하는 키티와는 다르게 안나는 스스로가 내연녀 역할을 자처한다.

"브론스키가 식탁을 둘러보는 것이며 하인에게 머리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나 돌리에게 생선 수프를 먹을지 아니면 다른 수프를 먹을지 묻는 걸 보고 돌리는 주인이 모든 걸 직접 챙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아하니 안나는 베슬롭스키만큼의 영향력이 있을 뿐이었다. 안나와 스비야지스키, 공작 영애와 베슬롭스키는 그들을 위해 준비한 것을 기꺼이 이용한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로 손님이었다.

안나는 대화를 이끌어갈 때만 안주인이었다." (3권, p.143)


행복해지기 위해서 강렬한 사랑을 했고, 강렬한 사랑을 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안나가 생각하는 '열정적인 사랑'은 어디까지나 도파민 중독과 같은 신기루였다. 남편을 두고 외도하는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하는 밀당은 안나에게 엄청난 쾌락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일단 시작된 쾌락은 멈출 수가 없었고 더 강한 자극을 위해서 더욱 강렬한 사랑이라는 신기루에 매달리게 되었고, 스스로 자기 파괴적인 감정에 취해 모르핀에 의존하는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안나가 원하는 불꽃같은 자극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다. 점점 더 강하게 자극을 받아야 다시 도파민에 중독이 될 수가 있는데,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 이상 강한 자극을 받을 수가 없어서 괴로울 경우 결국에는 스스로가 사라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쾌락이 무조건 나쁜 것일까. 톨스토이는 레빈과 키티의 가정생활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기쁨에서 얻는 소확행을 인간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쾌락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몸을 움직여서 노동을 하고, 가사일이라든가 육아에 참여하면서 얻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 역시 일종의 '쾌락'이고 '능력'인데, 이러한 능력을 누릴 줄 아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론은 한 가지의 주제가 이 방대한 소설을 관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뭘 추구하면서 사느냐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행복'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안나가 선택한 행복과 레빈이 선택한 행복을 대조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안나와 레빈은 공통적으로 언제나 죽음을 생각한다. 브론스키 역시 안나와의 사랑으로 인해 자살시도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고통이 수반되는 행복만을 선택했던 안나와는 다르게 레빈과 브론스키는 살아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끊임없이 찾았고 인생의 목표에서 행복을 느꼈다.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매우 유명한 불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유명한 미술 비평가 존 러스킨의 아내인 에피 그레이와 라파엘전파 화가인 존 에버릿 밀레이의 불륜사건이다. 사실 존 러스킨이 너무했다. 이건 에피를 비난할 수가 없는데, 당시의 영국사회는 조선시대 못지않게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했던 빅토리아 시대였기 때문에 에피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결론은 에피는 러스킨과 이혼을 하고 밀레이와 결혼을 했지만 그 즉시 에피는 영국 상류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사교계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던 에피는 거의 평생을 집안에서만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그런 아내를 평생 안쓰러워했던 밀레이가 만년에서야 여왕에게 에피의 사교계 활동 금지명령을 풀어달라고 탄원을 넣었다고 한다. 사교계로부터 왕따를 당했던 에피는 그 나름대로 심적인 고통은 컸겠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무척 행복했다. 40년이 넘는 결혼생활 동안 8남매를 낳고 알콩달콩 사이좋게 살았던 에피와 밀레이의 사랑 이야기는 무척 애틋하게 다가온다.

밀레이가 그린 존 러스킨의 초상화
존 에버릿 밀레이, <오필리아>, 1851년
토마스 리치몬드, <에피 그레이 초상화>
영화 <에피 그레이>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은 카레닌도, 브론스키의 탓도 아니다. 주어진 일상에 충실하면서 또다른 사랑을 시작한 레빈과 키티 커플과는 다르게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신기루를 붙잡으려고만 했던 것에 안나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결론은 톨스토이가 이 소설을 통해서 사람은 뭘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어떻게 살 때에 진짜 행복이 찾아오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끊임없이 자아성찰을 한 레빈은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안나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 고통스러워 했던 브론스키 역시 고통을 잊기 위해 인생을 살아야 할 목표를 찾았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것에 안나의 비극이 있었던 것이고, 결론은 안나의 마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행복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솔직한 후기


오래전에 국립발레단이 출연한 크리스티안 스퍽 안무의 <안나 카레니나>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방대한 소설을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 이야기로만 엄청나게 압축을 한 작품이었는데, 그 날 조재혁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선율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장 중요한 발레 장면은 워낙에 오래된 기억이어서 가물가물하다. 안나 역의 박슬기 발레리나와 브론스키 역의 이재우 발레리노의 애절한 연기장면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원래는 원작을 읽을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크리스티안 스퍽 외에도 존 노이마이어를 비롯해 몇몇 안무가들이 이 작품으로 토대로 드라마 발레를 만든 것을 알게 되어 없던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르고 고른 <안나 카레니나>. 낙엽이 지는 계절에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고는 세 권이나 되는 벽돌책들을 책장에 꽂아놓았더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무 잘못이 없는 벽돌책들이 괜히 숙제처럼 느껴져 노려보는 일들이 반복되자 그냥 읽기로 하고 그대로 쭉 내리읽었다.


사실 재미는 없었다. 특히 레빈의 농촌생활과 철학적인 성찰들, 당대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러시아 사회문제나 이념에 관한 부분들에서는 내 영혼이 가출해버렸다. 그 와중에도 톨스토이의 심리묘사에는 무척 놀랐다. 톨스토이가 각 인물들을 묘사한 것을 읽고 있으면 마치 해당 인물의 정신세계나 내면세계를 탐험하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금까지 예리한 통찰력에 놀란 작가들이 있긴 있었지만 이런 느낌은 톨스토이가 처음이다.


역자 후기에 나온 것처럼 키티는 강렬한 존재감을 발하는 안나에 가려져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 오히려 안나보다도 키티가 훨씬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안나가 매력적이기는 하다. 지성과 미모를 갖춘데다 종잡을 수 없는 안나의 성격은 밀당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렬한 아름다움에 이끌려 가까이 갈수록 뾰족뾰족한 가시가 있고 그 안에 치명적인 독이 들어있다. 그녀의 이러한 드라마틱한 매력 때문에 수많은 연출가들이 <안나 카레니나>를 만들었고, 관객들 역시 키티보다는 안나를 보고 싶어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 역시 안나에 대한 고민을 끌어안고 책을 읽으면서 윤리적인 재단을 하지 않고 그녀를 조금이라고 이해하려고 했던 이유가 측은지심이 들어서였다. 예측불가능해서 기 빨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일 아니듯이 그녀를 판단하기에는 그녀가 내게 연민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안나 카레니나>, 취리히 발레단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안무의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역의 다이애나 비쉬네바와 브론스키역의 콘스탄틴 즈베레프
안나 카레니나역의 빅토리나 카파토노바, 브론스키역의 데니스 비에이라, 취리히 발레단
안나 카레니나역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브론스키역의 아르테미 벨야코프, 볼쇼이 발레단




이 소설에는 또하나의 꿀잼이 숨어있다. 주인의 생각을 꿰뚫어 볼 뿐만 아니라 주인의 명령을 나름대로 판단하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레빈의 사냥개인 라스카가 나오는 부분이다.

'글쎄, 주인이 하라니까 하겠다만 여기에 내 책임은 없는 거댜.' 개는 이렇게 생각하고 네 다리를 힘껏 뻗어 언덕 사이로 돌진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그 옛날 인간과 동물이 의사소통을 하는 동화책들이 떠올랐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숨어있는 또다른 꿀잼은 세상에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대하는 레빈의 모습이다. 아직 핏덩이인 자신의 아이를 대면대면하게 대하는 레빈의 모습은 우리네 아빠들의 모습이다. 무척 현실감있게 묘사를 해서 많이 놀랐다. 아빠들의 부성애는 낳은 정보다는 키우는 정이다. 책 속에서도 레빈이 육아에 참여하면서 진짜 아빠가 되어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톨스토이가 동물의 생각을 읽은 장면과 신생아를 사진찍듯이 묘사한 장면에서 '만약에 이 분이 동화작가였다면? 동화의 세계에서도 한 획을 그으셨을텐데.'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https://youtu.be/Rkp0IDIeCSY?si=OfFwcTorDuuYGZrh

https://youtu.be/mnZXWoroOdw?si=AjBbXR-ByUrDEUV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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