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스키 vs 볼쇼이 버전
마린스키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은 지금까지 작품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꽃의 왈츠", "바가노바 메소드"라는 작은 주제로 매년 12월이 될 때마다 반복되는 루틴처럼 언급을 했었다. 그러고보니 볼쇼이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은 단 한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나서 나도 깜짝 놀랐다.
러시아 발레단의 양대산맥의 <호두까기 인형>의 버전을 빌려와 쓰고 있는 한국. 유니버설 발레단은 마린스키 버전, 국립발레단은 볼쇼이 버전을 사용한다. "두 버전이 어떻게 다른가요?", "아이들 데리고 연말에 보고 싶은데, 어느 버전을 봐야 더 좋은가요?"와 같은 질문들도 매년 반복된다.
마린스키 버전
유니버설 발레단이 빌려쓰고 있는 마린스키 버전은 마리우스 프티파 & 레프 이바노프의 공동안무로 러시아 황실극장에서 초연, 이후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안무가 바실리 바이노넨이 개정한 버전이다. 바이노넨이 안무를 수정한 바람에 프티파의 색깔이 많이 희미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고풍스럽고 화려한 황실무도회나 연회장같은 정취가 묻어나는 버전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풍요로움을 담은 1막의 각 장면들은 마치 19세기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듯 하며 레프 이바노프의 눈송이 왈츠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단연 돋보이는 군무이다. 데생의 선을 강조한 신고전주의 미술처럼 형식미를 중시한 프티파가 <호두까기 인형>의 안무를 제작할 당시에 몸이 안 좋아진 덕분(?)에 레프 이바노프가 안무를 전담하면서 발레 <호두까기 인형>은 인상주의의 점묘법처럼 흐드러진 붓질과 색채 그리고 시적인 분위기를 형식미 위에 덧칠할 수 있었다.
2막은 동화나라의 각 요정들이 관객들의 여흥을 북돋기 위해 선보이는 디베르티스망이 주요 감상 포인트이다. 하지만 마린스키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 중에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춤은 마샤와 왕자님의 그랑 파드 되이다. 전반적으로 연기보다는 클래식 발레 테크닉이 매우 중요한 2막에서는 안무 자체가 베이직하다. 베이직하다고 해서 쉬운 것이 아니다. 그 동안에 고강도의 클래식 발레 테크닉을 장기간 훈련받은 무용수들만이 출 수 있는 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발레훈련으로 다져진 무용수들 입장에서는 안무가 비교적 쉽다고 느껴질 수 있으며 군무와 의상으로 묻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초심을 다잡지 않으면 안 되는 버전이다.
볼쇼이 버전
볼쇼이 발레단은 소련에서 만들고 의도적으로 키운 발레단이다. 소련의 공산당은 당연히 궁중무용같은 화려함을 싫어했고, 동화같은 환상도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고풍스러운 춤보다는 역동성을 중시했던 공산당들의 취향에 맞게 볼쇼이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에도 공산당의 입김이 들어가 있다. 황실극장에서 여흥으로 만들어졌던 2막의 요정들의 디베르티스망은 볼쇼이 버전에서 인형들의 춤으로 바뀌었다. 마샤가 요정들의 나라에서 사탕요정이 되어 왕자님과 그랑 파드 되를 추는 장면도 볼쇼이 버전에서는 마리가 왕자님과 결혼식을 올리면서 그랑 파드 되를 추는 춤으로 바뀌었다. 초안의 모든 것을 바꾸면서 볼쇼이 스타일의 <호두까기 인형>을 만든 안무가는 유리 그리고로비치이다.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안무한 <스파르타쿠스>를 떠올려보면 무용수들의 기량과 역동성, 타고난 피지컬이 매우 중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이러한 안무의 특징들이 발레 <호두까기 인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볼쇼이 버전을 쓰고 있는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과는 달리 볼쇼이 발레단에서는 아역들이 전혀 나오지 않고 오직 성인 무용수들이 마린스키 버전보다 훨씬 단순한 무대의상을 입고서 타고난 피지컬과 갈고 닦은 발레 실력으로만 승부를 본다. 마린스키 버전보다도 단순한 무대에 의상도 덜 화려한데다 눈송이 왈츠와 꽃의 왈츠의 군무진도 비교적 단촐하다. 게다가 2막에서 푸르스름한 조명은 "이 발레 버전은 무척 잔잔하구나."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다.
하지만 이 천재 안무가의 안무와 무용수들의 춤에 집중을 하면 이 작품에서 반전을 느낀다. 볼쇼이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은 무대 맨 끝에 서서 춤을 추는 단원들도 결코 관객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의상과 인원수에 결코 묻어갈 수 없도록 무용수들 각 개인의 춤실력과 기량이 다 드러나도록 동선과 배치를 교묘하게 설계했다. 즉 마린스키 버전에 비해 단촐한 군무진을 지그재그로 배치했기 때문에 객석에서도 군무를 추는 각 개인 무용수들의 체형과 춤선이 시야에 확 들어온다.
또한 볼쇼이 버전에서 1막 후반부부터 나오는 인형들의 춤은 주역이 아닌데도 무용수들의 캐스팅이 매우 중요한 배역들이다. 민속춤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리고로비치는 인형들의 춤에 정성을 들였다. 인도의 사바신을 표현한 듯한 손동작과 폴드브라가 일품인 인도인형의 춤은 춤추는 무용수들의 기량이 매우 중요한 배역이다. 러시아 인형도 마린스키의 러시아 요정의 춤보다 훨씬 역동적이며, 중국인형의 춤 역시 540도 회전을 하면서 마네주를 도는가 하면 프랑스 인형의 춤에서도 탕 드 플레슈와 고난이도의 점프동작이 나오는 등 기본 발레 테크닉에서 한층 추가된 응용 테크닉들이 많이 나온다.
주인공 마리와 호두왕자의 파드 되에서 선보이는 파드 되는 커플궁합이 맞아야 좋은 파드 되가 나올 수 있는 춤이다.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어려워지는 리프트가 연속으로 나오며 발레리나의 코어근육과 신체제어능력이 뛰어나야 좋은 춤이 나올 수 있는 안무이다. 또한 마리가 1막에서 입고 나왔던 벨튜튜는 신체비율과 피지컬이 좋지 않으면 무척 소화하기 힘든 치마길이이다. 호두왕자님의 새빨간 의상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이 버전은 무용수들의 피지컬과 각 개인마다 역량이 탁월한 무용수들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안무가가 자신있게 만들었던 버전인 것이다.
인간 호두까기 인형의 관절춤, 군무진의 움직임까지도 선명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눈결정체처럼 추상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는 눈송이 왈츠, 무용수들의 에너지 확장까지도 보이는 꽃의 왈츠 군무, 주인공 마리의 다채로운 폴드브라와 음악성, 춤추기 까다로운 마리와 호두왕자의 웨딩 파드 되 등에 집중을 한다면 볼쇼이 버전의 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다.
2024년 볼쇼이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에서 볼쇼이의 스타 엘리자베타 코코레바가 마리 역을 맡았다. 코코레바가 2막의 '파드 되' 중 회전하는 부분에서 처음에는 오히려 신체를 제어하면서 회전을 하다가 점점 빠른 템포로 회전하는 장면 그리고 베리에이션에서 현악기의 피치카토에 맞춰 물기 털듯이 손끝을 털고 발끝으로 스타카토를 한 후 영롱한 첼레스타의 선율에 맞춰 에튀튜드로 악센트를 주는 부분에서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 발레 무용수들의 안정적인 테크닉과 뛰어난 기량은 오히려 자신의 신체를 제어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https://youtu.be/xtLoaMfinbU?si=a_D1GI4_tooQClWF
볼쇼이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https://youtu.be/TlVz_gqnyTA?si=How8SZaYTv9avOh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