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단순한 무용복만 입은 그들이 있는 곳에 베토벤 음악이 춤추고 있었다. 몸의 선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게 남자는 타이츠, 여자는 레오타드만 입고 춘 베자르의 작품은 과한 의상이 전혀 없는데도 오히려 무용수들의 에너지에 집중하면서 혁신의 아이콘 모리스 베자르가 무용 언어로 창조한 메세지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베자르는 4악장으로 구성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무용 언어로 창조하면서 각 악장별로 의상색을 달리해세상을 이루는 4원소에 담긴 기질을 표현했다. 4원소인 흙, 불, 물, 공기(이 작품에서는 환희)가 의미하는 서로다른 에너지가 함께 조화를 이룬다는 메세지를 작품 속에 담아냈는데,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애초에 발레 음악이 아님에도 어찌나 무용 동작들과 잘 어울리던지 원래 발레를 위해 태어난 음악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렇게 '인류가 화합한다.'는 메세지가 담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20세기 발레 혁명가 모리스 베자르에 의해 무용 언어로 창조되면서 원래도 대곡인 교향곡이 더 거대한 작품으로 재탄생되었다.
세상이 창조되고 있는 것처럼 신비로운 선율로 시작하는 1악장은 생명의 기원인 흙을 상징한다. 브라운 색상의 무용복을 입은 무용수들은 음악이 시작함과 동시에 아직 태어나지 않고잉태된 생명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오케스트라가 악센트를 주면 태동하는 것처럼 힘차게 손을 뻗었다. 음악이 전개되면서 무용수들은 생명의 탄생과 함께 신중하면서도 열정적인 흙의 기질을 힘찬 에너지가 담긴 춤을 통해 함축적인 메세지를 전달했다.가끔 팀파니의 연타로 무용수들이 동작에 긴장감을 주지만 이내 목관악기의 온화한 선율이 흘러나오면서 무용수들은 원을 그리며 부드러운 분위기로 춤을 풀어나간다.
익살스러운 선율에 활기가 넘치는 춤이 즐거운 2악장은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불의 기질과 붉은 색을 상징한다. 붉은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댄스 배틀을 하는 것처럼 춤을 추고 있으나 대립이나 갈등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에 즐거워하고 있다. 가끔 팀파니가 훅 들어오면서 무용수들의 동작에 긴장감이 돌지만 결국에는 서로에게 즐거운 호기심을 보이면서 어우러지고 있다. 이 작품 중에서 발레의 정체성을 가장 잘 지킨 발레다운 악장으로 발레 무용수들이 끌어올리는 호흡과 함께 상승 에너지를 잘 느낄 수 있다.
3악장은 물의 에너지를 상징한다. 주역 무용수 2명과 코르 드 발레(군무)로 이루어진 3악장에서 무용수들은 화이트 색상의 옷을 입고 가장 절제된 춤을 보여준다. 특히 주역 무용수인 엘리자베트 로스는 생명수를 형상화한 폴드브라를 통해 물의 유연함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맨발로 춤을 추는 3악장은 춤의 경계가 거의 없다. 응축된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무용수들의 호흡도 상승이 아닌 자연과 하나가 되고 있다. 3악장에서 발레와 현대 무용을 구분짓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각자 달랐던 무용 언어들이 하나가 되는 악장이다.오직 발레리나 엘리자베트 로스가 가끔씩 허공에 보여주는 푸앵트만이 이 작품이 발레 작품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4악장의 도입부에서 첼로 선율과 함께 춤을 추는 발레리노는 자유의 상징과 같았다. 부드러운 야성미로 경계를 넘나드는 매력을 지닌 발레리노가역동성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발현하면서 보여준 멋지고 아름다운 춤은 빛이 되어 나에게 아름다움과 환희를 안겨주었다.
1악장에서 3악장까지의 주제선율이 차례로 연주될때 각 악장의 원소들을 대표하는 무용수들이 등장해 서로 대화하듯이 어우러져 환희의 송가를 춘다. 이어 첼로와 베이스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자유와 환희의 상징이기도 한 발레리노가성악, 기악과 조화를 이루면서 보여준 탄력있고 유려한 퍼포먼스에 나의 시선은 4악장이 전개되는 내내 그 무용수를 따라다녔다. 계속 환희의 송가가 변주되면서 단원들도 환희의 멜로디를 춘다. 특히 합창단원들의 환희의 송가에 맞춰 춤을 추는 발레리나의 독무는 토슈즈로부터 해방되고 공식처럼 지켜왔던 발레의 문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춤 그 자체였다.
음악이 고조되면서 모든 단원들이 원을 그리며 성악, 기악과 하나가 되면서 화려한 퍼포먼스의 막을 내린다.
베토벤이 전달하고자 했던 인류애의 메세지를 베자르는 강렬한 에너지를 담은 춤을 통해 그대로 표현했다. 발레 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한 스트레칭 동작들을 그대로 차용해 안무로 사용한 베자르는 정형화된 발레의 틀을 깨고 움직임을 탐구하면서 발레에 모던을 입혔다. 나도 모르게 발레와 현대 무용의 경계를 구분짓던 서로 다름에서 오는 경계심을 베자르의 작품을 보면서 허물었다. 베자르의 작품에서 춤은 메세지와 움직임이었다. 서로 다른 것은 즐겁고 아름답다는 베자르의 메세지는 무용 언어를 넘어서서 나에게 느낌표가 되었다.
이렇게 역동적이고 강렬한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 무용수들은 매우 길고 지루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연습과정을 거쳐왔음을 너무나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기에 그들이 보여준 동작 하나하나가 정말 소중했다. 원래 춤이라는 예술은 추는 것과 동시에 소멸되지만 이렇게 영상물로 제작되어 영속성을 지니게 된 것에 감사한다. 일본인 무용수들과 서양인 무용수들의 체급이 너무 차이가 난다는 처음 생각은 악장이 전개됨에 따라 어느새 지워지고 나도 모르게 그들과 하나가 되어 마음속으로 함께 호흡하고 춤을 추었다. 그날 함께 참여했던 예술가들과 관객들은 인생에서 다시 만나기 힘든 순간이었을 것이고 동시에 가장 빛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